
이번엔 동갑내기 도련님과 노예로 시작하는 라일요거 시리즈입니다.
영감을 받은 트윗이 있습니다. 요구르카명예시민님: https://twitter.com/PPcckk52/status/1428565795567669258?s=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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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거트는 10살 생일에 선물로 라일락이라는 동갑내기 또래 노예 아이를 받았음ㅋㅋ... 집안에 널린게 요거트를 돌볼 시종들이지만 어른들 생각은 좀 친구처럼 지내면서 더 편하게 부려먹으라고(?) 선물한 아이임... 처음 요거트는 라일락을 선물해 준 사람이 엄청 대단한 장난감이라도 주는 줄 알고 기대했다가, 자기보다 쪼끄만 진한 보라색 머리 남자애가 들어오니까 "뭐야, 사람이잖아!" 하고 다소 실망했지만, 그래도 애는 애라서 금방 "친구하면 되겠다!" 하고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ㅋㅋㅋ
라일락은 요구르카 저잣거리에 버려진 고아였음. 그래도 한 대여섯살까지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던 기억이 있긴 함... 하지만 그때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고, 심지어 부모님은 사이가 안 좋았음... 어쨌든 집안이 좋지 않았는데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라일락은 어찌저찌 거리에서 살아남긴 했는데, 하루는 모르는 어른들이 밥 준다길래 따라갔다가 노예 시장에 팔려나가게 된 것임... 거기서부터 라일락은 말을 잃었음. 너무 충격 받아서; 그 노예 시장에서 요거트네 친지가 라일락을 보고, 예쁘장하게 생기고 아직 어린애가 노예 시장에 올라와 있으니 좀 딱한 마음에(?) 라일락을 사다가 요거트 10살 생일에 선물한 것이지... (물론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은 불법입니다!! 의도가 어쨌든 불법!!)
라일락은 요거트 대저택에 처음 왔을때 말이 없었음... 요거트가 "이름이 뭐야??" 하고 물었을 때 겨우 짧게 "라일락." 이라고 대답한 거 외에는... 요거트가 "어디서 왔어? 뭐 좋아해?" 이런거 물어봐도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거나 절레절레 하는 걸로 대답함. 요거트는 "말을 못하는 앤가봐." 하고 조금 흥미가 떨어졌음... 친구면 이것저것 얘기하면 좋은데 라일락은 말을 안 하니까; 그래도 어른들은 "같이 데리고 다니다 보면 말문이 트일거다" 하면서 잘 데리고 다니라고 함ㅋㅋㅋㅋ 요거트는 라일락이 별로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어딜 가든 꼭꼭 데리고 다니기는 함ㅋㅋㅋㅋ(10살이라 아직은 어른들 말 잘 들음ㅋㅋㅋㅋ)
10살 요거트의 하루는 노는게 제일 좋아 그 자체임ㅋㅋㅋㅋㅋ 애기 체력이라 아침 8시에 득달같이 일어나서 밥 먹고(맨날 대충 먹거나 안 먹어서 시종들이 쫓아다니면서 도련님~~!! 밥 좀 드세요~~~!!! 함ㅋㅋㅋㅋ) 오전에 놀고 점심 먹고 오후에 놀고 저녁 먹고 자기 전까지 논다ㅋㅋㅋㅋ 물론 공부도 하긴 함... 가정교사가 와서 글이랑 셈 가르쳐주고 요구르카 역사 공부하고 하는데... 엄청 지루해 함ㅋㅋㅋㅋ 옆에 있는 라일락은 글도 셈도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요거트 옆에 앉아있는게 다임ㅋㅋㅋㅋ
하루는 가정교사가 숙제를 내주고 갔는데 그 숙제가 죽어도 하기 싫었던 요거트... 옆에 있는 라일락을 불러서 "너가 내 숙제 대신 할래?" 하는데 라일락은 머뭇거림... 글을 몰라서 숙제를 대신 해줄 수가 없음ㅋㅋㅠㅠㅠㅠ 라일락이 대답이 없으니까 요거트는 "싫어? 넌 내가 해달라는 건 뭐든 다 해줘야 되잖아!" 하고 투정을 부리다가 한참 뒤에야 "혹시 너 글 못 읽어?" 하고 물어봄ㅋㅋㅋ 그제야 라일락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지...
"헐~ 10살인데 아직도 글을 못 읽으면 어떡해!" 요거트는 자기도 공부 죽어라고 안 하면서 괜히 라일락에게 핀잔을 주고는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 하고 삐뚤빼뚤 글자를 쓰는데ㅋㅋㅋㅋㅋ 가정교사가 글씨를 예쁘게 쓰라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그 말은 죽어도 안 들어먹은 덕에 엉망 진창임ㅋㅋㅋㅋㅋ 그래도 또 열심히 가르쳐 주겠다고 가나다 쓰고 읽고 하고 있지ㅋㅋㅋㅋ 지나가던 어른들은 보기 드물게 요거트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우리 요거트크림도 다 컸구나~ 혼자 공부도 하고." 하면서 칭찬해 주는데, 그들은 몰랐다... 요망한 꼬맹이 도련님이 지 숙제 안 하고 시종한테 떠넘기려고 글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ㅋ....
라일락은 말을 안 할 뿐이지 머리는 좋아서 금방 글자를 읽혔음. 어느정도 익히고 나서 요거트는 "그럼 여기 니 이름 써봐!" 하는데 라일락이 어설프게 자기 이름을 쓰겠지ㅋㅋㅋ 좀 엉망이긴 해도 라일락이 글자를 쓰게 되었으니까 기쁜 요거트는 "여기 옆에 내 이름도 써봐!" 할거고ㅋㅋㅋㅋ 라일락은 요거트 이름도 삐뚤빼뚤 써줌ㅋㅋㅋ 요거트는 그거 보고 신이 나서 어른들한테 가서 "이거 봐! 내가 라일락한테 글자를 가르쳐 줬어! 라일락이 내 이름도 써줬다??" 하고 자랑을 실컷 하는데 어른들은 잘했다 하면서도 "그래도 시종한테 너무 많은 걸 가르쳐 주지는 마렴." 이라고 함... 요거트는 이해가 안 됐다... 왜? 글자를 알면 라일락이 자기 대신 숙제를 다 해줄텐데!
그렇게 글자를 익힌 라일락은ㅋㅋㅋㅋㅋ 요거트가 글씨 쓰기 숙제를 하기 싫어하는 날이면 대신해서 그 숙제를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글이 확 늘었음ㅋㅋㅋㅋㅋㅋ 요거트는 라일락한테 숙제를 시켜놓고 자기는 램프 집사한테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와라 하면서 간식이나 쪽쪽 먹고, 먹다가 먹기 싫은 건 라일락한테 주고 그랬음ㅋㅋㅋ 셈 공부도 마찬가지ㅋㅋㅋ 첨에 라일락이 셈도 잘 모르고 하니까 숫자 읽는 법 이런거 가르쳐 놓고 셈하기 숙제도 다 라일락한테 몰아줌ㅋㅋㅋㅋㅋㅋㅋ 덕분에 라일락은 공부를 실컷 했다.... 가정 교사가 와서 요거트 숙제를 검사하면 묘하게 글씨가 좀 다른 거 같은데, 의심스러워서 요거트에게 물어보면, 요거트는 또 잔머리는 끝내주게 잘 돌아가서 대답은 척척 잘 함ㅋㅋㅋㅋㅋ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ㅋㅋㅋㅋㅋㅋㅋㅋ
글도 셈도 늘고, 요거트가 워낙 옆에서 별별 소리를 쫑알대다보니 라일락도 슬그머니 말문이 트임ㅋㅋㅋ 어느날은 요거트가 "나 이거 하기 싫어, 안 할래!" 하고 숙제를 내던져 놓고 드러누우니까, 옆에 있던 라일락이 "요거트크림..." 하고 부름; 다짜고짜 바닥에 드러누웠던 요거트는 라일락이 자기 이름을 밝혔을 때 이후로 단 한번도 듣지 못했던 라일락의 목소리가 들리자 벌떡 일어났음;;
"너 혹시 말했어???" 요거트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일락을 붙잡았지ㅋㅋㅋ 라일락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임ㅋㅋㅋ "헐, 다시 말해봐!!" "... 요거트크림." 라일락이 다시 이름을 불러주자 요거트는 얼굴 가득 기쁨에 차서 방방 뛰어다님ㅋㅋㅋㅋㅋ "와, 라일락이 말을 했어!!!" 하고ㅋㅋㅋㅋㅋㅋ 그리고는 다시 라일락 옆에 와서 "너 이름도 말해봐!!" 하면 라일락이 "라일락." 하고 대답해주고ㅋㅋㅋㅋㅋㅋㅋ 다른 말도 할줄 아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라일락이 "... 숙제 해야되잖아." 하고 얘기해 줌ㅋㅋㅋㅋㅋㅋㅋ 그 얘기 듣고 팍 식은 요거트였다....
이 뒤로 라일락은 짧게나마 요거트랑 대화할 수 있게 됐음ㅋㅋㅋㅋ 그래서 요거트는 라일락이 더 좋아짐ㅋㅋㅋㅋ 자기가 글도 가르쳐주고 셈도 가르쳐주고 이제는 얘기도 같이 하고 숙제도 해주고(?) 다 하는 걸! 그러다보니 어울려서 장난치는 날도 많아질듯ㅋㅋㅋㅋ 요거트 방 침대에서 방방 뛰고 베개 던지고 장난감 잔뜩 늘어놓고 놀고ㅋㅋㅋㅋ 물론 라일락은 처음엔 늘 이렇게 해도 되나? 싶지만 요거트가 "괜찮아, 괜찮아!!" 하고 잡아 끌면 그제야 같이 신나게 놀거 같음ㅋㅋㅋㅋㅋ
근데 애들 장난이... 하다보면 다치는 일도 있겠지... 한번은 침대에서 둘이 방방 뛰어 놀다가 요거트가 침대에서 미끄러지면서 다리가 부러짐; 요거트는 아파 죽는다고 엉엉 울어대고, 당황한 라일락은 후다닥 달려 나가서 어른 시종들을 불러왔지. 라일락을 따라 도련님 방에 온 어른 시종들은 깜짝 놀라서 얼른 의사를 불러왔음. 요거트는 눈물콧물 범벅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자기 죽는거 아니냐고 온갖 엄살을 부려댔음ㅋㅋㅋ
그러는 사이에 라일락은 집안 어른들한테 벌을 받았음... 네가 요거트를 모시는 가장 가까운 시종인데, 시종이 도련님이 다치는 걸 막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다음에는 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도련님이 다치지 않게 보호하라고 하면서 종아리 맞고 옴.... 요거트는 다리에 두꺼운 붕대 둘둘 감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고 그제야 라일락이 어디 갔는지 찾았는데, 라일락은 그때 마침 얼굴 새빨개져서 눈물 방울방울 떨어뜨리면서 비틀비틀 걸어왔지...
라일락이 울고 있으니까 너무 놀란 요거트는 "누가 너 괴롭혔어?? 누구야??!!!" 하고 화를 바락바락 냈음... 아직 애기라서 가녀린 종아리에 회초리 맞은 자국이 나 있으니깐 요거트는 라일락을 혼낸 어른한테 막 화를 냈지. 왜 라일락을 혼내냐고, 라일락은 잘못 없다고 막 악 쓰면서 대듦; 라일락을 혼낸 어른은 요거트가 크게 화를 내니까 잠시 당황해서 미안하다 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서 요거트한테 단호하게 "쟤는 네 친구가 아니라 너를 도련님으로 모셔야 하는 시종이고, 시종이라면 마땅히 너를 지키는게 의무다. 주인과 시종은 격이 다른 법이다" 라고 훈계함... 거기에 충격 받아버린 애기 요거트...
그날 밤에 요거트는 붕대를 감은 다리를 바라보면서 라일락을 불렀음... 라일락은 낮에 맞은 종아리에 아직도 빨갛게 회초리 자국이 나 있구... 요거트는 그게 미안해서 "미안해 라일락..." 하고 사과하면서 종아리 문질문질 해줌... 라일락은 반대로 붕대를 둘둘 감은 요거트 다리를 만져주면서 "내가 더 미안해, 요거트크림..." 해줌... 요거트는 어른들이 뭐라고 하든 라일락이 자기 친구고 지금처럼 맨날 같이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함... 하지만 라일락은 오늘 혼난 이후로 확실하게 자각이 생겼지. 요거트는 도련님이고, 자기는 일개 시종이라는 걸. 그래서 라일락은 이제부터는 요거트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하겠다고 생각함. 그래야 요거트도 안 아프고 자기도 혼나지 않을테니까.
이 뒤로 둘의 관계가 쪼끔 달라짐... 라일락은 이제 요거트랑 둘이 있을 때는 평소처럼 편하게 반말을 하지만, 어른들, 특히 요거트네 집안 어른들이 있을 때는 존댓말을 씀. 요거트는 처음에 "너 왜 나한테 존댓말 써????" 하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어른들이 "그럼 시종이 도련님인 너한테 존댓말을 써야지, 혹시 반말 쓰니?" 하고 물어보면서 라일락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니까 요거트도 눈치를 채고 "아 아냐, 그치 라일락?" 하고 얼른 말을 바꿈... 라일락도 "네 도련님." 하고 대답해주고...
2
해를 넘겨 11살이 되었을 때, 라일락은 본격적으로 무술 훈련을 받게 되었음. 요거트도 같이... 근데 요거트는 그냥 체력 단련과 간단한 호신술 정도만 배우고 끝인데, 라일락은 좀 혹독하게 무술 훈련을 받게 됨. 도련님을 모시는 가장 가까운 시종이잖아. 유사시엔 라일락이 요거트를 지켜야 하니까 무술을 할 줄 알아야지... 그래서 둘은 늘 같은 시간에 훈련장으로 내려갔지만, 요거트는 훈련이 빨리 끝나서 금방 저택으로 돌아오고, 라일락은 한참이나 훈련장에 남아서 혹독한 체력 단련과 다양한 무기 다루는 법들을 배우게 되었음. 집안 어른들은 라일락이 어려도 봐주지 않았다... 라일락은 매일 다치고 넘어지고 구르고 힘들어서 쓰러져도 무술 훈련을 받아야했다... 무술 사범 또한 엄격해서, 라일락을 정말 빡세게 가르침...
라일락이 훈련장에서 무술 훈련을 받는 동안 요거트는 좀 더 어려운 공부를 하게 되었지. 이젠 글쓰고 셈하기 수준은 벗어나서 요구르카 역사 공부나 어린이를 위한 경제학 기본 같은걸 배우게 됐는데 여전히 공부하기가 너무 싫음ㅋㅋㅋㅋㅋ 전처럼 맨날 라일락이랑 놀고, 라일락한테 숙제 대신 하라고 시키고 농땡이 부리면 좋을텐데, 요즘 라일락은 훈련장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는단 말이지... 그래서 요거트도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게 됨ㅋㅋㅋ 물론 늘 잔머리를 굴려서 요리조리 쏙쏙 빼먹긴 했지만ㅋㅋㅋㅋ
이런 나날이 꽤 오래 지속이 됐고, 그들은 나이를 먹어서 이제 16살이 되었음. 5년간 끊임없이 무술 훈련을 받은 라일락은 이제 웬만한 어른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만한 실력자가 되었음. 그사이 키도 훌쩍 자라서(무술을 익히는 동안엔 잘 먹고 잘 자는게 중요하다고 가르친 무술 사범 덕에) 이제는 요거트보다 키도 커지고 덩치도 좀 있게 됨ㅋㅋㅋㅋ 워낙 마른 체질이라 그렇게까지 떡대는 아니고... 요거트는 그동안 집안에서 워낙 오냐오냐 받들어서 키워갖고ㅋㅋㅋㅋ 싹바가지 사춘기를 맞이하게 됨ㅋㅋㅋㅋㅋㅋㅋㅋ
라일락의 무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게 되었으니 무술 훈련 시간이 많이 줄었겠지? 그래서 요거트랑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단 말이야ㅋㅋㅋ 간만에 서로 마주한 둘은 처음 마주했던 10살의 상대방과는 확 달라진 걸 체감함... 라일락은 눈빛이 진지해지고 체격도 딱 각이 잡힌, 보통 시종이 아니라 무술을 익힌 호위 무사라는 느낌이 나도록 변했고, 요거트는 여전히 철부지인데다 이젠 사춘기를 곁들인 그야말로 깐족대며 상대방 놀려먹고 자극하는데 딱 특화된 모습이 됐단 말이야ㅋㅋㅋㅋㅋㅋ
"여~ 너 키가 좀 컸다? 처음 만났을 땐 나보다 작았는데." 요거트가 라일락을 툭툭 치면서 약간 질투섞인 시비조로 말하는데 라일락은 대답이 없음ㅋㅋ... 사범님 스타일 그대로 빼다 박아서 입도 무겁고 겁나 진지한 애가 되어버림ㅋㅋㅋㅋ 요거트는 깐족대며 라일락한테 몇 번 시비를 걸어봤는데, 라일락이 무반응이니까 금방 흥미가 떨어져버림... 물론 라일락도 속으론 빡쳤음ㅋㅋㅋㅋ 얘도 사춘기는 사춘기일테니까... 자기가 모시는 도련님만 아니었으면, 사범님이 무술인은 아무때나 주먹 내지르는 거 아니다 하고 가르쳤던게 아니었으면 이미 요거트랑 한판 했을 성깔임 얘도ㅋㅋㅋ 하지만 꾹꾹 눌러 참았지...
16살 생일이 지난 요거트는 이제 혼자서 요구르카 시내로 나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음ㅋㅋㅋ 그래서 요거트는 거의 매일같이 요구르카 시내를 쏘다니며 맨날 놀러다님ㅋㅋㅋㅋ 거기에 라일락도 같이 붙어 다녀야지ㅋㅋㅋㅋ 위험한 짓을 하거나 혹시 모를 위험이 닥치면 요거트를 보호해야 하니까. 요거트는 아직 어려서 용돈을 그렇게 많이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청소년이 지니기엔 너무 큰 돈이긴 했음ㅋㅋㅋㅋ 근데 요거트는 어차피 집안에 남아도는 게 돈이고, 어른들한테 조금만 떼를 쓰면 생기는 게 돈이라서 정말 감각 없이 돈을 펑펑 썼지ㅋㅋㅋ 라일락은 그런 요거트가 못마땅했음...
"돈은 이제 그만 써. 남은 것도 얼마 없잖아." 라일락이 한심한 눈으로 조언을 하면, "왜? 집에 남아도는 게 돈인데? 너무 남아서 썩어날 지경인데 내가 쓰면 큰일나나? 어차피 이까짓 거, 아버지나 형들한테 달라고 하면 금방 다시 생겨. 그리고 너도 우리집 돈 먹고 살잖아." 하고 깐족대기나 하는 요거트... 라일락은 역시 속으로 빡쳤지만 참았음...
근데 어린애가 돈을 펑펑 쓰고 다니니 나쁜 어른들한테 표적이 안 될 리가 없지... 이 거리에 어린 도련님이 돈을 펑펑 쓰고 다닌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니, 이를 노리는 나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요거트를 꼬드기려고 별 수작을 다 부림ㅋㅋ;; 요거트는 아직 어려서 물건 보는 눈이 별로 없단 말이야. 그러니 장사치들의 농간에 놀아나서 별 이상한 물건을 사거나, 좋은 물건을 준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요거트에게 완전히 불리한 도박판에 저도 모르게 참여한다거나 하게 되었단 말이지? 라일락은 요거트가 하는 꼴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은 오는데, 역시 아직 어려서 사리분별이 분명하지가 않음... 게다가 라일락이 옆에서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라고 말해도 요거트는 "네가 뭘 알아? 나보다도 보는 눈 없으면서." 하고 코웃음이나 치고 말이야.
그렇게 요거트는 받은 용돈을 저잣거리에서 탈탈 털리고 오는 날이 많아지게 됨... 집안 어른들도 애가 자꾸 용돈을 타가는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 같으니 걱정되기 시작하지. 그래서 몇번 불러다가 타이르고 해봤는데, 사춘기의 요거트는 싸가지가 바가지라서 어른들한테 대들기만 하고 제멋대로 굴지; 하는 수 없이 집안 어른들은 라일락을 달달 볶게 됨; 니가 요거트랑 맨날 같이 다니니까 쟤가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거들랑 좀 말려라 하고. 라일락은 예 알겠습니다 했지만 요거트가 안 들어먹을 거 알고 있음ㅋ...
하루는 또 요거트가 수상한 상인들한테 딱 걸려서 이상한 물건을 사려고 하는 거야ㅋㅋㅋ 물건 보는 눈이 없는 라일락이 봐도 너무 허접한 물건이라 말릴까 싶은데, 사지 말라고 하면 또 이자식이 자존심 건드리는 소리나 할거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음. 근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수상한 상인들이야... 요거트는 그것도 모르고 상인들이 하는 사탕발림 소리에 넘어가서 돈을 내밀려고 하는데, 보다못한 라일락은 요거트의 팔목을 잡았음.
"너 뭐하는 거야?" 요거트가 라일락을 돌아봤지. 라일락은 요거트의 손을 뒤로 물리고, 상인들에게 "같잖은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지 말라" 고 했어. 상인들은 흥이 깨져서 안 살려면 말라면서 슬그머니 꼬리를 말고 도망가버렸어. 라일락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요거트는 라일락의 손길을 거칠게 떼어버렸어. 그리고 화를 내기 시작했지. "네까짓게 뭔데 나를 방해해?" "나는 네 호위야. 너를 지킬 의무가 있어." "말이 좋아 호위지, 시종 나부랭이잖아. 시종이 주인 하는 일에 끼어들어도 되나?"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라일락은 입을 다물었음. 대신 조용히 요거트를 노려봤지. "좀 잘 대해줬다고 이런 식으로 기어오르는 모양인데, 정신 똑바로 차려. 너는 내 시종일 뿐이니까." 그렇게 말한 요거트는 찬바람이 불도록 몸을 돌려 먼저 저택을 향해 걸어가버렸어. 뒤에 남은 라일락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지.
저택으로 돌아온 둘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요거트는 기분이 나빠서 애꿎은 시종들에게 화를 냈지. 라일락은 요거트가 다른 시종들에게 화를 내거나 말거나 자기 방으로 들어왔어.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요거트가 헛짓거리를 하는 걸 막은 거 밖에 없는데, 모욕을 당한 기분이라 아주 기분이 나빴지. 당분간은 요거트를 쳐다도 보고 싶지 않지만, 아마 내일이면 또다시 요거트는 저잣거리에 나가겠지? 그러면 거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잖아. 그 생각을 하니 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라일락은 분을 삭히기 위해 훈련장으로 내려갔어. 그리고 밤새도록 허수아비에 대고 화풀이를 했지.
다음날 요거트는 저잣거리에 나가지 않았어. 어제 일이 기분이 나빠서 당분간은 안 나갈거래. 대신 방에 틀어박혀서 시종들을 달달 볶아댔어. 끊임없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하는데, 시종들이 조금만 늦거나 어리숙하게 반응하면 화를 있는대로 내는거야. 아주 사춘기의 절정이었지. 방 건너에서 요거트가 하는 꼴이 소리로 들리는데, 라일락은 그것도 듣기가 싫어서 귀를 막아버렸어. 보다 못한 어른들이 요거트에게 찾아와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으니, 요거트는 라일락이 자기 일을 방해한 것에 대해 성토를 해댔어. 어른들은 라일락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요거트가 길길이 날뛰고 있으니 그저 알겠다 알겠다, 라일락을 혼내겠다 했지.
집안 어른들 앞으로 불려온 라일락은 또 한 소리를 들었어. 물론 요거트가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막은 건 잘했다고 그들도 칭찬했지만, 태도가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었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다음엔 더 공손한 태도로 요거트를 대하라고 하는 거야. 라일락은 어이가 없었지. 요거트도 자기를 하대하고 있잖아! 하지만 어른들 앞이니 라일락은 또 그냥 예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어...
일주일 뒤에야 요거트는 기분이 좀 풀린 모양인지 다시 저잣거리에 나가겠다고 했어. 그런데 라일락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야. 집안 어른들은 그건 안된다고 말렸지. 아무리 그래도 혼자 나가는 건 무리다, 반드시 호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야. 요거트는 그러면 라일락 말고 다른 호위를 데려가겠다고 했어. 하지만 다른 호위 무사들은 각자 할일이 있어 데려갈 수 없었지. 결국 요거트는 아주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시 라일락을 데리고 외출을 하게 되었어. 이건 라일락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
그래서 둘은 거리로 나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라일락은 오늘이야말로 요거트가 질 나쁜 상인에게 걸려 돈을 탈탈 털리든, 저급 물건을 사서 손해를 잔뜩 보든간에 절대로 신경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어. 요거트가 물건을 구경하고 있을 땐 아예 다른 곳을 보면서 서너발 떨어진 곳에 서 있었지.
그러는 사이에 지난번에 라일락 때문에 요거트에게 물건을 팔지 못했던 상인들이 슬그머니 다가왔어. 요거트를 알아보고 사람 좋은 척 또 사탕발림 소리를 해댔지. 요거트는 또 거기에 넘어가서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내줄듯이 몸을 기울이고 있었어. 라일락은 요거트가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지 알아보고는 그때 그 자식들인 걸 알았지만 무시하기로 했어. 손해를 보거나 말거나, 그건 요거트가 책임질 몫이니까.
그런데 이 상인들, 오늘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요거트에게 다가온 거였어. 요 꼬마 도련님이 쓰는 돈을 보아하니 보통 부자인게 아닌거 같거든? 그래서 아예 납치를 해다가 집안을 협박해서 큰 돈을 뜯어낼 속셈이었지. 하지만 늘 옆에 눈빛이 무서운 호위 무사가 붙어있으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오늘은 어쩐일인지 호위 무사가 다른데를 보고 있고, 거리도 좀 떨어져 있잖아? 오늘이야말로 기회다 싶은 그들은, 요거트를 꼬드겨서 사탕 같은 걸 먹게 했어. 아무런 의심 없이 그걸 받아 먹은 요거트는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들어버렸지.
"꺅, 도련님!!!" 상인 중 누군가가 큰소리로 요거트를 불렀어. 멍하니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라일락은 화들짝 놀라 요거트가 있던 자리를 돌아봤어. 그런데 거기에 요거트는 없고, 대신 아까까지 요거트를 상대하고 있던 상인 세 놈이 요거트를 들처메고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어! 라일락은 아뿔싸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들의 뒤를 쫓았지. 요거트는 기절한건지 정신을 잃은 건지, 그들이 아무렇게나 들고 뛰어가는데도 축 늘어진 채였지.
라일락은 무슨 정신으로 그들을 쫓았는지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달려서, 결국엔 그들을 앞질러 경로를 막았어. 그리고 납치범들 뒤로는 요구르카 경비대가 금방 쫓아와서 그들을 포위했어. 궁지에 몰리자 납치범들은 본색을 드러냈어. 정신을 잃고 잠든 요거트 목에 칼을 들이대며, 움직이면 이 도련님을 죽여버릴 거라고, 당장 돈과 함께 자기들이 도망칠 퇴로를 확보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 잘못하면 요거트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라 라일락도 경비대도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어. 긴장되는 대치가 한동안 이어졌지. 라일락은 이대로는 요거트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 일단 자기가 물러나는 척 하면서 기회를 노리기로 했어.
라일락은 납치범들을 노려보며 뒤로 한발 물러섰지. 납치범들은 라일락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다가, 라일락이 뒤로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하자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왔어. 여차하면 다시 요거트를 들고 뛸 기세야. 라일락은 망토 안으로 차크람을 쥐었어. 그리고 속으로 하나둘셋을 세고, 그들 중 한명을 향해 차크람을 던졌지. 순식간에 납치범 셋 중 하나가 차크람에 어깨를 맞고 비틀거리며 쓰러졌어. 나머지 둘이 당황하는 순간 라일락은 다른 차크람을 던져 다리를 노렸지. 동시에 요구르카 경비대도 납치범들에게 달려들었어.
경비대가 엎치락 뒤치락 납치범들을 제압하는 동안 라일락은 재빠르게 요거트를 빼냈어. 혹시 요거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닌가 훑어보니, 다행히 요거트는 잠든 것 외에는 큰 일은 없어보여. 라일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그런데 납치범 중 하나가 경비대에게 잡히지 않으려 발악하다가, 라일락과 요거트를 노리고 단검을 던졌어. 라일락은 요거트를 보호하려고 감싸려다가 단검을 등에 맞고 말았지. 등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통에 라일락은 이를 악 물었어. 하지만 얼마간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
요거트는 잠깐이었지만 정말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이제야 정신이 들었어. 부스스 눈을 떠보니 사방이 요란하니 시끄럽고, 자기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데 익숙한 느낌이야. 고개를 들어보니 라일락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 깜짝 놀랐는데, 라일락은 이를 악 물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어. 정신이 번쩍 든 요거트는 벌떡 일어났지. "라일락, 너 왜이래!?" 요거트가 허둥지둥 하는 사이에 경비대가 다가와 라일락의 등에 꽂힌 단검을 빼냈고, 피가 많이 나고 있으니 당장 돌아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어. 요거트는 급한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저택으로 돌아왔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라일락은 치료를 받았어. 그런데 생각보다 깊게 찔린 상처여서, 아마 흉터가 남을거래. 라일락은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되었고, 요거트가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반면 요거트는 엄청나게 걱정스러운 눈치였어. 의사가 치료를 다 마치고 라일락에게 붕대를 감아주고 나서도 계속 의사에게 라일락이 죽는 건 아닌지, 치료는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닦달을 해댔지. 의사는 괜찮다고, 앞으로 2주는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갔지만.
집안 어른들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라일락이 다쳐서 돌아왔는지 궁금해서 둘을 만나러 왔어. 요거트는 상인들에게 사탕을 받아 먹은 뒤로는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거기까지밖에 이야기 하지 못했고, 그 뒤로는 라일락이 요거트에게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씀드렸지. 집안 어른들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둘을 내려다 봤어. 요거트도 이번만큼은 자기가 잘못한게 맞았기 때문에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지.
집안 어른들은 요거트에게 당분간 저잣거리로 나가는 건 금지라고 했어. 그리고 제대로 된 경제 관념과 물건 보는 법을 다 익힐 때까지는 절대 거리로 나가지 말라고 했지. 요거트는 공부를 또 해야 한다는 말에 불만스러웠지만, 이번엔 어른들이 엄격하게 말했기 때문에 더이상 토를 달 수 없었어. 그리고 어른들은 라일락에게 요거트를 위험에 처하게 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 요거트는 자기를 구한게 라일락인데 왜 라일락이 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화를 냈지. 하지만 어른들의 의견에 라일락도 동의했어. 요거트를 쳐다보는 게 싫어서 다른데에 한눈을 팔고 있었던 게 맞긴 하니까...
라일락은 등의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벌을 받게 됐어. 매질이었지... 요거트네 형들 중 하나가 매를 들었어. 라일락은 무릎을 꿇고 앉아 등이며 팔에 가해지는 매를 맞았어. 철썩 소리와 함께 맞은 자리가 화끈거릴 때마다 라일락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어. 요거트는 라일락이 매를 맞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결국 그 자리를 뛰쳐나가고 말았지... 10대나 되는 매를 맞고 나서야 라일락은 자리에서 일어났어. 온몸이 화끈거리고, 다친 상처도 다시 찌르르하게 아픈데도 라일락은 집안 어른들에게 허리숙여 인사했어...
그날 밤, 라일락은 맞은 자리도 그렇고 상처가 쑤셔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침대에 제대로 누울 수가 없었거든. 이렇게 누워도 아프고, 저렇게 누워도 아프니까 결국 일어나 앉은 라일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의사가 준 약이라도 바르고 싶은데 하필 등이라서 팔도 닿질 않네... 이래저래 비참한 기분이 든 라일락은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지.
그런데 희미하게 노크 소리가 들렸어. 라일락은 감았던 눈을 떴어. 잘못 들은거 같아 고개를 갸웃한 라일락은 다시 노크 소리를 들었어. 이 밤중에 누구지 싶어 라일락은 일단 들어오라고 했지.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는데, 거기 서 있는 건 요거트였어. 요거트는 고개를 푹 숙인채 "라일락, 안 자?" 하고 물었지. "아직." 라일락은 짧게 대답했지. 요거트가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고 살금살금 라일락의 방 안으로 들어왔어.
"그, 저..." 라일락에게 다가온 요거트가 머뭇거렸어. 라일락은 오늘 하루가 무척 피곤했지만, 이런 시간에 요거트가 자기를 찾아온 데엔 이유가 있을 거 같아 차분하게 요거트가 할 말을 기다렸지. 요거트는 한참이나 두 손을 꼼질거리면서 밍기적 거리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었어. "미안해."
라일락은 조금, 아니 많이 놀랐어. 요거트가 자기한테 사과를 할 줄은 몰랐거든. 잠시 얼이 빠져있던 라일락은 "괜찮아." 하고 대답했어. 그랬더니 요거트가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나 때문에 다쳤잖아! 게다가 형한테 매까지 맞았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하는 거야. 라일락은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요거트를 바라보기만 했어. 요거트는 힘없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라일락의 침대에 걸터앉았지.
"...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어. 미안해..." 요거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다해 사과했어. 라일락은... 요거트가 이렇게 직접 자기를 찾아와서 사과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지. 요거트는 가만히 라일락이 무슨 대답을 할지 눈치를 봤어. 그 시선을 느낀 라일락은 정말 할 말이 없어서, 또다시 "괜찮아..." 라고 대답해 버렸어.
요거트가 "또 똑같은 대답을 하네. 안 괜찮잖아, 너..." 하고는 매질 자국이 남은 라일락의 팔을 가리켰어. "아프지 않아?" 라일락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지. 아프긴 아픈데, 아프다고 얘기하면 요거트가 걱정을 더 많이 할거 같아서 말이야.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요거트가 재차 물었어. 라일락은 짧게 음... 하다가, "... 상처가 아픈데, 약을 바를 수가 없어서..." 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요거트가 자기가 약을 발라주겠다고 했어. 라일락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요거트가 부득불 자기가 해주겠대ㅋㅋ...
요거트는 연고를 들고 라일락이 등에 감은 붕대를 살살 풀었어. 몇년에 걸친 무술 훈련으로 잘 다져진 등근육 위에 꽤 깊은 상처가 나 있었지. 벌어진 상처에서 진물이 나오고 있어서 일단 진물을 닦아낸 뒤에, 요거트는 연고를 듬뿍 떠서 상처 위에 발랐어. 근데 이런걸 처음 해봐서, 얼마나 발라야 좋을지 잘 모르겠는거야ㅋㅋㅋ 좀 덕지덕지하게 발린 것 같아... 머쓱해진 요거트가 "... 너무 많이 발랐나봐, 어쩌지?" 했는데, 라일락은 그냥 괜찮다고 했어.
다시 붕대를 감아야 하는데 요거트는 이것도 해본 적이 없었어. 아까 감겨 있던 형태를 생각하며 얼기설기 감긴 했는데 영 이상해... 대충 상처가 가려지도록 붕대를 감은 다음에 매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요거트에게, 라일락이 매듭은 자기가 짓겠다고 했어. 아무리 봐도 어설픈 모양새였지ㅋㅋㅋ...
"... 좀 이상하다." 영 허술한 붕대 꼴을 보고 요거트가 머리를 긁적였어. "아냐, 충분해. 고마워." 라일락은 고개를 가로젓고 감사를 전했어.
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지. 요거트는 다시 제 손가락을 꼼질대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어. 라일락도 차마 요거트를 바라보기 뭐해서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요거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선을 그리로 옮겼어. "그, 다시 한번 말할게.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요거트가 아주 쑥스럽게 웃으며 사과와 감사를 전하고는, 이만 가서 자야겠다며 서둘러 라일락의 방을 나섰어. 방문이 닫히기 직전, 요거트는 고개만 살짝 내밀어서 라일락을 쳐다봤어. 그리고 말했지. "잘 자, 라일락."
방 문이 닫히자 사방이 다시 조용해졌어. 라일락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사실 좀 얼떨떨해서, 꿈인건 아닌가 하고 가슴 위로 묶은 붕대 매듭을 만지작 거렸어. 엉망진창인걸 보니 꿈은 아닌 거 같아. 등도 아까보다 덜 아프고 말야. 그제야 라일락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누웠지.
등의 상처가 아무는 동안 요거트와의 관계도 조금은 회복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3
그 일이 있은 뒤로, 요거트는 저잣거리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 묶여서 경제학 공부를 다시 함ㅋㅋㅋ 그리고 물건을 보는 눈을 길렀어. 엉뚱한 물건 아무거나 막 사지 말라고 말이야. 부잣집 막내라면 그정도 소양은 필수라고 말이지! 요거트는 공부하는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막상 해보니까 꽤 재미있었음ㅋㅋㅋ 특히 보석이나 보물 감정하는게 가장 재미있었지. 자기 손으로 귀한 물건을 직접 찾아낸다는 느낌으로?
라일락은 등의 상처가 다 나을때까지는 무술 훈련을 간단하게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요거트의 옆에서 보냈어. 물론... 그날 밤 이후로 요거트와는 조금은 누그러진 관계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어색한 채로 말이지. 그래도 요거트는 라일락에게 그때만큼 깐족대거나 시비를 걸진 않았음. 라일락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커서 말이야...
라일락 등의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지만, 의사 말대로 흉터가 크게 남았어.
18살 생일이 지나자 요거트는 이제 요구르카 사교계 모임에 나갈 수 있게 됐음. 요거트는 처음으로 나가는 사교계 모임이 엄청 기대됐지ㅋㅋㅋ 거기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요구르카의 저명 인사들이고, 다들 엄청나게 아름답게 치장하고 오니까! 요거트는 벌써 한달도 더 전부터 사교계 모임에 입고 갈 옷이나 장신구들을 고민해 놓고 있었어ㅋㅋㅋㅋㅋ 형들과 누나들은 "막상 가면 그렇게까지 재밌진 않을텐데~" 했지만, 그런 소리도 요거트의 기대를 꺾지 못했지ㅋㅋㅋㅋ
라일락은 사교계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음... 철저한 신분제 때문에 참여가 불가능했지. 요거트는 라일락이 호위 무사 신분으로 같이 가야 하는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집안 어른들은 반대했어. 그 자리는 요구르카의 모든 '눈'과 '귀'가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에 조금만 허튼 모습이 보이면 바로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라고 말이야. 결국 그날은 요거트의 다른 형과 누나가 함께 가주기로 했지.
라일락은 요거트가 하루하루 사교계 모임에 대해 이야기 할때마다 막연히 상상해봤어. 요구르카 귀족들의 파티라, 아마 이 집안 사람들만큼 대단한 인물들이 모여들겠지? 그리고 저마다 옷이며 장신구, 보석, 자기의 재력을 뽐내며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할거야. 그런 자리에 요거트가 낀다고 하니까 좀 이상해. 지금 자기 옆에서 공부하기 싫다고, 얼른 사교계 모임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투정부리고 있는 요거트는 아직도 한참 어린애 같았거든...
드디어 사교계 모임 날이 되었어. 오후 늦게부터 시작하는 모임이었지만, 요거트는 당일 아침부터 아주 부산스레 준비를 해 댔지. 시종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막내 도련님의 치장을 도왔어. 요거트는 한달 전부터 입을 옷을 골라두었는데, 막상 입고 가려니까 마음에 안 든 모양인지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 모양을 바꾸고 장신구를 갈아끼고 해댔어. 거기에 라일락은 딱히 끼어들 자리가 없어서, 라일락은 슬그머니 훈련장에 내려가서 무술 훈련으로 몸을 풀고 돌아왔지.
한참뒤에 돌아왔더니 요거트가 바쁘게 라일락을 불렀어. 빨리 자기 좀 봐달래. 이상하지 않은지 말이야. 라일락은 뭐 별거 있겠느냐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요거트의 침실로 들어갔는데...
치장을 마친 요거트가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데, 생전 처음보는 사람 같은 거야. 평소에도 요거트는 요구르카 저잣거리에 나갈때 허투루 나가는 법이 없었어. 그냥 나가면 품위가 안 산다나? 그런데 이번엔 정말 작정하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자리에 가는 거잖아. 확실하게 요거트가 돋보일 수 있도록 꾸며놨으니,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 놨겠어? 라일락은 생전 처음보는 요거트의 모습에 말을 잃었어. 그러니까... 넋을 잃었다고 봐야겠지.
"라일락, 왜 말이 없어? 이상해? 이상하면 빨리 얘기해.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단 말이야." 요거트가 초조한듯 재촉하자 라일락은 퍼뜩 정신이 들었어. "어, 음..." "많이 이상해?" 라일락이 영 시원찮은 표정이니까 요거트가 재차 물었지ㅋㅋㅋㅋ "... 아냐, 잘 어울려." 라일락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한참을 고르다가 겨우 말했어. 요거트는 눈썹을 찌푸리며 진짜냐고 하는데, 라일락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지. 그러니까 옆에 있던 시종이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한숨을 푸우욱 내쉬는 거야ㅋㅋㅋㅋ 내내 시달렸던 거지ㅋㅋㅋ
이제 더는 뭔가를 수정할 시간이 없어서 요거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 "나 네 말만 믿고 이대로 간다? 알겠지??" 요거트는 라일락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부채를 챙겨 들고 급히 나갔지. 라일락은 그자리에 서서 복도를 뛰어가는 요거트의 뒷모습을 바라만 봤어.
그날 요거트의 사교계 데뷔는 아주 성공적이었어. 요거트 가문의 수많은 남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막내 도련님으로 말이야! 모두의 시선과 찬사를 받으며 요거트는 굉장히 즐겁고 신나는 시간을 보냈음ㅋㅋㅋ 모두가 자기를 바라보며 말 한번씩 걸고 싶어 난리인데, 어찌 즐겁지 않겠어ㅋㅋㅋㅋㅋ 요거트를 데리고 온 형과 누나도 얘는 진짜 천상 사교계 타입이구나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음ㅋㅋㅋㅋㅋ
요거트가 돌아올 때까지 라일락은 다시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냈어. 사범님이 대련을 해주셨거든. 아주 늦은 시간까지 훈련이며 대련을 하다가 돌아오니, 어느새 요거트가 와 있었어. 요거트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재잘재잘 있었던 일을 떠들어 댔지. 대부분은 라일락도 알아듣지 못하는 가문들의 이름과 어려운 말들 뿐이었지만, 라일락은 요거트의 텐션이 엄청 높은 걸로 봐서 대단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구나 짐작했음ㅋㅋㅋㅋㅋ
"너도 한번쯤 가봤으면 좋겠다!" 어느새 입었던 옷과 장신구를 다 벗고 화장까지 지운 요거트가 발랄하게 말했지. "진짜 재미있었어. 다들 친절하고 교양있고. 네가 가도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 같은데!" 요거트가 씩 웃으며 라일락을 바라봤어. 평소 보던 그 얼굴 그대로야. 라일락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어.
그 뒤로 요거트는 사교계 모임에 꼬박꼬박 참여했지. 매번 스타일을 바꿔가며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려함으로 무장하고 말이야ㅋㅋㅋㅋㅋ 그때마다 죽어나는 건 치장을 도와주는 시종들이었음ㅋㅋㅋㅋㅋ 하지만 결과물이 아주 만족스러우니 그들도 나름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요거트는 이제 저잣거리에 나가면 물건을 아무거나 사지 않고, 좀 더 고급진 물건, 같은 라인이라면 무조건 최상급 물건만을 고르게 됨ㅋㅋㅋㅋ 그래야 사교계에 나가서 자랑할 수 있으니까ㅋㅋㅋㅋㅋ 그리고 전에는 요거트 상단이 하는 일이나 가져오는 물건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만, 이제는 누구보다 상단의 결과물을 기대하게 됐고, 무엇이든 신기하고 희귀한 보물이 있다면 그걸 수집하는데 공을 들이기 시작함ㅋㅋㅋㅋㅋ
라일락은 요거트가 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지. 특히 요거트가 모임날 아침부터 요란하게 스스로를 꾸미는 모습을 보며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자기는 늘 그대로인 것 같고,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는데, 요거트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거든.
물론 라일락은 2년 전보다 키도 더 컸고, 덩치도 이제는 웬만한 어른만큼 각이 잡혀서, 누가봐도 든든한 호위 무사의 태가 나게 됐어. 라일락이랑 같이 어울리는 시종들은 늘 "진짜 많이 컸다, 라일락~ 전보다 훨씬 더 잘생겨졌네. 옷만 잘 갖춰입으면 도련님 못지 않겠어!" 하고 칭찬까지 해줌ㅋㅋㅋ 본인도 거울을 보면 확실히 어른이 되어 가는 거 같긴 한데... 그건 겉모습뿐이야. 아직 자기 내면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이 느껴지거든. 생활도 늘 똑같고...
하지만 요거트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잖아. 게다가 라일락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느껴져서, 라일락은 이전보다 좀 더 요거트가 자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구나를 실감하게 됨. 특히 요거트가 사교계에 나가기 위해 치장을 마치고 나면.... 정말 다른 사람 같다고 느껴지지.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도저히 제 손으로는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아름다움.
요거트는 사교계 모임에서 늘 주목받았음ㅋㅋㅋㅋ 가문의 명성도 있고, 꼬마 도련님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누구나 한번씩은 다 쳐다봤단 말이야.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요거트를 흠모하는 이들도 생기지 않았겠어? 특히 요거트 나이 또래 아가씨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지ㅋㅋㅋㅋ 다행히 요거트는 집안에서 배운대로 그 아가씨들에게 아주 매너있게 행동했음ㅋㅋㅋㅋ
그러던 어느날, 요거트는 사교계 모임에서 어떤 아가씨에게 고백을 듣고, 교제 요청을 받았어. 사람들이랑 대화하는게 마냥 즐거웠던 요거트는 이런게 처음이라 깜짝 놀랐음. 상대방 아가씨가 굉장히 수줍게 웃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요거트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렸지 뭐야. 그래서... 자기 딴에는 나름 정중하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 했는데, 아무래도 아가씨는 살짝 실망한 눈치였음ㅇㅇ...
그날 사교계 모임에서 돌아온 요거트는 치장을 모두 벗어 던진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는 조금 시무룩한 기분이 되었음.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요거트는 멍하니 발코니에 걸터 앉아서 아까 있었던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
라일락은 요거트가 없는 동안에 훈련장에 가 있다가, 저녁 늦게서야 저택으로 돌아왔는데, 무심코 요거트 방을 올려다보니 글쎄, 요거트가 위험하게 발코니 난간에 걸터앉아 있지 뭐야! 깜짝 놀란 라일락은 급하게 2층으로 올라가서 요거트의 방으로 들어갔지. 누가 방으로 들어오자 요거트도 놀랐는데, 그게 라일락인 걸 알고 "뭐야, 라일락이잖아~" 하고 실없이 웃었음ㅋㅋ
"위험하게 거기서 뭐하는 거야." 라일락은 심각한 얼굴로 요거트의 팔을 잡아 끌어서 난간에서 요거트를 내려놨어. 요거트는 "가끔은 이런데에 있고 싶을 수도 있는 거거든?" 하고 라일락에게 핀잔을 줬지. 아무리 그래도 라일락은 그건 아니라고, 위험하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어. 요거트는 "예, 예~ 호위 무사님 말을 들어야지요." 하고는 어깨를 으쓱 해버리고 말았는데, 아무래도 표정이 밝지 않은 게 라일락의 눈에 띄었음.
"무슨 일 있었어?" 라일락이 물었지. 요거트는 곁눈질로 라일락을 흘끗 봤다가, 이런 얘길 라일락에게 해도 좋을까 잠시 고민했는데, 어차피 혼자 끌어안고 있어봐야 답도 안 나오고 답답하기만 하니까 그냥 툭 다 털어놔 버렸어ㅋㅋㅋ "나 고백 받았어." 하고ㅋㅋㅋ....
"근데 너무 생각지도 못하게 받은 거라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적당히 거절했는데, 그쪽이 엄청 실망하는 눈치더라고. 내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나?" 요거트는 머쓱하니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어.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았으려나? ... 라일락?"
라일락은 요거트가 고백을 받았다는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어. 하긴, 그럴 나이이긴 해. 18살이잖아. 요거트가 이성에게 혹은 이성이 요거트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나이지. 라일락은 늘 훈련장에 있거나 요거트와 함께 지내다보니 원래 이성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 시종들이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단 말이야. 막내 도련님이 사교계에 진출했으니 조만간 연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어떤 연인을 사귈 것인가, 막내 도련님의 이상형은? 뭐 이런 얘기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라일락은 시종들에게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시종들이 "라일락은 이렇게 잘생겨선 완전히 쑥맥이구나?" 하면서 까르르 웃고는, 남녀 관계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설명해 주었거든...
그런데... 시종들의 예상이 맞았어. 요거트가 고백을 받다니... 그럼 이젠 요거트에게도 '연인'이 생기는 걸까? 그 연인과 함께 데이트를 하고 손도 잡고 함께 웃고 그러다가 키스도 하고...? "라일락,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일락이 하도 대답이 없자 요거트가 재촉해서 불렀어ㅋㅋㅋ 라일락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지.
"어, 음... 아냐. 적당히... 대처했다고 생각해... 미안, 나는 그런 거에 대해 잘 몰라서." 라일락이 대답하자 요거트가 그럼 그렇지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어. "하긴, 너나 나나 뭐 이런 일이 있었어야지... 너랑 이런 얘기 하는 거 진짜 이상하다." 요거트는 쑥스럽게 웃어버리고는 이제 그만 자야겠대. 라일락은 알겠다고, 다시 한 번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요거트에게 잘자라는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왔지.
자기 방으로 돌아온 라일락은 기분이 이상했어. 이성에게 고백까지 받은 요거트가 진짜로 멀리까지 가버린 기분. 근데 거기에 알 수 없는 싱숭생숭한 감정이 섞여있어. 마치 처음 사교계에 간다고 치장을 마친 요거트를 처음 마주했을때의 그것과 비슷한데, 그것보다 좀 더 복잡한 느낌이야. 라일락은 괜히 가슴이 답답했어. 속이 영 답답하니 한숨을 크게 내쉬었는데도 해소가 안 되는 거 같아. 갑자기 병이라도 난 걸까? 라일락은 내내 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가 고민하다가 밤을 새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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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요거트는 몇번인가 고백을 더 받았어. 처음엔 어버버 했던 요거트도 이제는 여유있게 대처할 수 있게 됐어. 그러는 중에 이상형이라는 게 생겼지ㅋㅋㅋ 고백해 오는 아가씨들은 모두 예쁘고 상냥하고 요거트네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부자였는데, 이제 이런걸 따져서 생각할 수 있게 된거야ㅋㅋㅋㅋ 그러다 조금은 마음이 맞는 상대가 있어서, 그쪽과는 몇번 더 만남을 가지게 됐지 뭐야!
요거트는 자기가 처음 사귄 연인에 대해 정성을 다했음ㅋㅋㅋ 처음 사귄 상대라서ㅋㅋㅋㅋㅋ 가족들은 요거트의 연애에 대해 관심이 엄청 많았는데, 요거트는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며 부끄럽다고 가족들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어ㅋㅋㅋㅋ 그런데 라일락에게는, "넌 내 친구니까 다 얘기해도 되지?" 하면서 다 털어놓는 것임ㅋㅋㅋㅋㅋ 오늘은 그 아가씨와 어디를 갔고 뭐를 먹었고 어떤 이야기를 했다 아주 시시콜콜한 것까지 죄다 라일락한테 말함ㅋㅋㅋㅋㅋㅋㅋ
라일락은... 요거트의 연애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어... 그래... 그렇구나.... 오늘은 뭘 했구나... 어떤 대화를 나눴구나... 이런 기분으로 말이야. 그런데 얘기를 계속 듣다보니 상상을 하게 되잖아. 멍하니 요거트와 그 아가씨가 데이트를 했던 것들을 상상해 보는데, 상상 속의 요거트는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야. 근데 라일락 자신은 그런 상상이 뭔가 썩 기분이 좋지가 않아... 라일락은 왜 요거트가 행복해지는 상상을 하는데 자기는 기분이 좋지 않은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
그러던 어느날, 데이트를 나갔던 요거트는 보기 드물게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얼굴로 돌아왔어. 가족들과 시종들 모두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는데, 요거트는 아무 일 없었다고 자기 침실에 콩 박혔단 말이지. 라일락도 요거트의 상태가 이상해서 무슨 일인가 궁금해졌어. 그래서 슬쩍 요거트의 방으로 가봤지. 그랬더니 요거트는 침대에 심각한 얼굴로 걸터앉아 있는 거야.
"... 무슨 일 있었지?" 라일락이 물으니 요거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어. 라일락은 작은 의자를 끌어다 요거트 앞에 마주보고 앉았어. 요거트가 우물쭈물 하는 거 같더니,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지. "라일락, 키스 같은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 라일락은 요거트가 고백 받았다고 처음 말한 이래로 두번째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음ㅋㅋㅋ 대체 무슨 소리야 이건... 라일락이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하니까, 요거트가 웃지 말고 진지하게 들으래. 자기는 지금 엄청 진지하니까 말이야.
데이트를 하는데 분위기가 좀 무르익으니까 그쪽 아가씨가 뭔가를 기대했던 것임ㅋㅋㅋㅋㅋ 아가씨가 슬그머니 요거트에게 팔짱을 끼고 키스 어필을 하는데 요거트는 한번도 이런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 신호를 전혀 못 읽은거야ㅋㅋㅋㅋㅋ 게다가 사실 연인이라고는 해도, 그냥 둘이서만 놀러다니고 대화하고 하는게 재미있는게 전부라고 생각했지, 연인들의 행위에 그렇고 그런게 끼어 있는줄 요거트가 알았겠냐고! 여튼 키스 어필이 실패하자 아가씨는 실망하며 "도련님, 생각보다 엄청 쑥맥이시네요." 하고 가버렸단 거야! 아가씨가 가고 나서야 요거트는 자기가 뭔가 잘못했구나 하고 깨달아 버린 거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일락은 대체 어디부터 짚어야 할지 고민이 됐음ㅋㅋㅋㅋ 라일락도 연애는 시종들한테 말로만 들었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깤ㅋㅋㅋㅋ 게다가 키스라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라일락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이 없으니, 요거트는 초조해져서 라일락을 붙잡았음... "너도 몰라? 그러면 이런 걸 누구한테 물어봐야해?"
한참동안 머뭇거리던 라일락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음ㅋㅋ "그..., 입술을, 이렇게... 해서..." 라일락이 어설프게 설명하자 요거트가 답답한지 "입술을 어떻게?? 이렇게 쭉 내밀라고?" "아니, 그렇게까진 할 필요 없고, 고개를 살짝 틀어서..." 라일락이 손동작으로 어떻게 설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요거트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눈치야ㅋㅋㅋ 답답해진 라일락은 요거트의 턱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살짝 틀었어. "이렇게. 상대방이랑 입을 그냥 맞추면 코가 부딪히잖아. 그리고..." "그리고?" 요거트가 다음은 계속 재촉하며 물었지. "이제 입술을 맞대면..."
라일락은 무심코 자기 고개도 살짝 틀었다가 멈칫했어. 난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상황 파악이 되자 등 뒤에 순간 식은땀이 흘렀지. 라일락이 설명을 하다가 멈추자 요거트가 다시 라일락을 불렀어. "그래서 이 다음엔 어떻게 해?" 당황하니까 요거트의 목소리는 아득히 들리는데, 재촉하는 입술은 너무나도 가까워보여. 라일락은 급히 시선을 옮기며 뒤로 물러났어. "엥? 왜 설명을 하다가 마는 거야, 라일락!" 요거트가 라일락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노크를 했어.
라일락은 화들짝 놀라 뒤로 두어발 더 물러났지. 요거트를 찾은 사람은 요거트네 형과 누나들이었어. 그들은 요거트가 오늘 데이트에서 기분이 나빠져서 돌아온 이유가 분명 스킨십에 실패해서 일거라고 예상하고, 가르쳐 주겠다고 찾아온 거였음ㅋㅋㅋㅋㅋ 마침 그 설명이 절실히 필요했던 요거트는 이번엔 그들을 붙잡았고, 그 틈을 타 라일락은 얼른 요거트의 침실을 빠져나왔어ㅋㅋㅋㅋ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대고 있었어...
형들과 누나들의 조언을 듣고 요거트는 이제 스킨십에 대해 조금 자신감이 생겼음ㅋㅋㅋㅋ 그리고 다음 데이트엔 꼭 연인과 키스를 해 보겠다고 다짐했지ㅋㅋㅋㅋ 하지만 한번 키스 어필에 실패하고 난 아가씨는 섣불리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음ㅋㅋㅋㅋ 생각보다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요거트가 투덜거렸지ㅋㅋㅋ "연애라는 거 왜 이렇게 어려워!?" 하고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 요거트의 첫 연애가 잘 진행이 되었느냐 한다면 그럭저럭 잘 굴러가긴 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음ㅋㅋㅋㅋ 사이가 나쁘게 깨진 건 아니고, 그냥 그쪽 아가씨가 사정이 생겨서 타국으로 이사가게 되었을뿐... 옆 나라 정도면 왕래하며 계속 만남을 이어갈 수 있었겠지만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서 장거리 연애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음. 그러다보니 양측 집안에선 결혼에 관한 논의도 나오긴 했는데, 18~19살은 결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여서 무리라는 결론이었지.
요거트는 첫 연애에 대해 아쉬워하긴 했지만 특별히 미련은 없었음ㅋㅋㅋ 나름 새로운 경험이어서 즐거웠거든ㅋㅋㅋ 반면 라일락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어... 만약 정말로 집안끼리 논의가 잘 되어서 요거트가 그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었다면... 라일락은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 그런데, 아직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잘 모르겠어... 그 이유를 알고 싶은데, 알면 안 될것만 같은 그런 느낌.
요거트는 그 뒤로도 몇 명의 아가씨와 좀 더 사귀어 보는 듯 했음. 워낙 잘난 도련님이다보니 고백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 탓에... 더러는 남자도 슬그머니 고백을 하는 듯 했는데, 요거트는 "왜 남자가 나한테 고백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투덜거렸어.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라일락은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음... 요거트크림은 남자가 고백하면 역시 싫어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번쩍 정신을 차린 라일락...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거야?
어쨌든 요거트의 연애는 들쭉날쭉 이어졌음ㅋㅋㅋ 어떤 아가씨와 만나도 처음 사귀었던 아가씨만큼 오래 가진 않았지... 왠지는 모르겠지만 요거트가 금방 그 상대들에게 싫증을 냈어. 그리고 꼭 험담은 라일락 앞에서만 했다는ㅋㅋㅋㅋ 라일락은 요거트의 불평불만을 들으며 그래그래 그렇구나 맞장구만 쳐 주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요거트의 이상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는 거 있지....
"으악, 진짜 짜증나!" 하루는 요거트가 나갔다 오더니 오자마자 신경질을 잔뜩 부림ㅋㅋㅋ 이런 때에 시종들은 괜히 잘못 걸리면 도련님한테 혼나니깐 조용히 뒤로 빠졌고ㅋㅋㅋㅋ 라일락이 요거트의 푸념을 들어주려고 옆에 있었지ㅋㅋㅋ 요거트는 머리를 잔뜩 풀어헤친채 침대에 드러누워서는 오늘 만난 아가씨에 대해 험담을 하기 시작했음ㅋㅋㅋㅋㅋㅋ
"걔는 맨날 나한테 이상한 것만 요구한다고! 오늘도 거의 헐벗고 왔다니까?" 아마도 요거트에게 어지간히 섹스 어필을 한 모양인데... 라일락은 "그래 그것 참 불편했겠네." 하고 끄덕끄덕 하면서도 생각했지... 요거트는 겉으로 보기엔 정말 사치스럽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정말 순진해 빠져선, 뭔가 본인이 의도한 스킨십이 아니고서는 절대 상대방에게 손을 대지 않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 그러고보니 이제까지 요거트가 먼저 스킨십을 시도한 거라고는 그냥 손 잡고 상대방을 가볍게 안아준 게 전부였네? 지난번에 그렇게 키스가 어쩌고 할때는 금방이라도 누군가와 키스를 할 줄 알았는데...
"다들 왜 그렇게 안달이야?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요거트가 몸을 뒤집어 엎으려 눕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며 투덜거렸지. "넌 해봤어? 라일락." "어? 아니..."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당연히 해봤을 리가 없잖아. 라일락은 당연히 고개를 가로저었지ㅋㅋㅋㅋ 요거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음ㅋㅋㅋㅋ "만약 네가 먼저 그런거 하게 되면 소감 좀 말해줘." 엉뚱한 제안에 라일락은 얼굴을 찌푸렸지. "... 별로 그런 얘기는 안 하고 싶은데." "뭐? 왜? 나는 너한테 이렇게 죄다 털어놓는데, 넌 말 안 하는거 치사하잖아!" "......." 라일락은 할 말이 없었음ㅋㅋㅋㅋㅋㅋ 아무리 이거저거 다 얘기한다고 해도 이건 좀....
"... 그러는 네가 먼저 하면, 그땐 나한테 말할거야?" 라일락이 역으로 물었지ㅋㅋㅋ 그랬더니 요거트는 대번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지! 내가 먼저 형님이 된 기념으로 상세하게 말해준다. 그래야 너도 듣고 배울 거 아냐." 하는데... 라일락은 기가 차서 헛웃음만 지었다는ㅋㅋㅋㅋㅋㅋ
그날밤 라일락은 자기 방으로 돌아왔는데... 참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요거트 말대로, 요거트는 늘 자기한테 있었던 일을 죄다 말하거든. 어떤 아가씨랑 뭘 했는지 마치 일기 쓰듯이 다 말하는데, 반대로 라일락은 요거트에게 뭔가 있었던 일을 말한 적은 없는 거 같고. 근데 딱히 뭔가 말하기엔 라일락의 생활은 늘 똑같은걸. 아침 일찍 일어나서 훈련장에서 몸 풀기, 요거트가 외출하면 따라 나가기, 요거트가 사교계 모임이나 데이트 할때는 저택에서 대기... 그럴땐 그냥 훈련장에서 훈련이나 대련하고. 그외엔 딱히...?
그외에는... 사실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요거트가 뭘 어떻게 하는지 그것만 예의주시하고, 거기에만 생각이 쏠려 있으니까... 말이지... 이쯤 오니 라일락은 어쩐지 제 얼굴이 뜨거워지는 듯 한데... 괜히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잠이나 자야겠다 하고 침대에 누운 라일락... 눈을 감고 잠이 들려는데 문득 요거트가 했던 말, "그런거 하면 기분 좋은가?" 라든지, "너는 해본 적 있어?" 라든지 "내가 먼저 하면 경험담 말해준다" 이런 말들이 의미 없이 생각이 나는 거야ㅋㅋㅋ 자기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라일락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찌푸렸지. 얼른 자자 하고.
그런데 그날은 꿈에 요거트가 나왔어... 요거트는 늘 그렇듯이 데이트를 나가려는 듯 옷을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라일락이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려니까 갑자기 라일락 팔에 팔짱을 끼는 거야. 놀란 라일락이 요거트를 돌아보니, 요거트가 "왜 그래? 오늘은 너랑 데이트 하는 날이잖아." 하고 헤헤 웃는데... 라일락은 그 순간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대는 거야. 라일락이 아무 말도 없으니까 요거트는 "얼른 가자, 라일락!" 하고는 그를 잡아 끌었어... 그리고 둘은 정말 신나게 요구르카 저잣거리를 쏘다니며 '데이트'를 했어.
하루종일 저잣거리를 쏘다닌 둘은 저녁 무렵에야 저택으로 돌아왔지. "아, 진짜 재미있었어! 역시 너랑 다니는 게 제일 좋아, 라일락!"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한 요거트는 치장을 훌훌 풀어 벗어던지고는, 편한 옷이 되었지. 라일락은 "나도 즐거웠어." 하고 인사하고 방을 나가려고 그랬는데, 요거트가 갑자기 팔을 붙잡는 거야. 라일락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요거트를 돌아봤지. 그랬더니...
"어디가? 오늘 밤엔 나랑 같이 있기로 했잖아." 하며 요거트가 라일락을 끌어당겼어... 라일락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살짝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려니까, 요거트가 팔을 꾹 잡고 안 놔주는 거야. 그러더니 두 팔을 뻗어 라일락의 목덜미에 감았어... 그러면서 배가 맞닿도록 몸을 밀착하는데, 그 순간에 요거트에게서 어찌나 좋은 향기가 훅 끼쳐오던지, 라일락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했어... "라일락..." 요거트가 이마를 맞대며 라일락의 이름을 불렀지... 라일락은 두 손을 어쩔줄 모르고 있다가 슬며시 요거트의 허리를 붙잡았는데, 두 손 안에 들어오는 허리가 너무나도 얇고 낭창한 것이... 라일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어.
"라일락, 너도 안 해봤지? 이런거..." 요거트가 그렇게 속삭이며 고개를 살짝 틀어 입술이 닿을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어. 화장을 했다가 지웠지만 코앞에 보이는 요거트의 입술은 여전히 촉촉하고 붉은기가 돌았지... 입술이 닿으면 왠지 달달한 맛이 날 것만 같은... 라일락은 입술이 닿기 직전에 무심코 요거트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어. 요거트가 움찔하며 입술이 닿기 전에 멈추어 버렸지.
"이, 이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 요거트크림." 라일락은 요거트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떠올리며 말했지. 그랬더니 요거트가, "흐으응."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라일락." 하고 속삭이는데, 라일락은 그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어. "그런..." "너도 날 좋아하잖아? 그치?" 요거트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어... 라일락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어... 라일락이 말이 없자 요거트가 다시 입술을 들이댔고... 입술 위에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라일락은 눈을 떴지.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이었어. 온 몸이 땀에 젖어 축축했지. 이게 무슨 꿈이야. 라일락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이마에 손을 갖다댔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꿈에 요거트크림이 나와서, 그런걸? 라일락은 너무 허탈한데 또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어 몸을 일으켰지... 그런데... 전에 없이 속옷이 축축한 거 같은... 그런 느낌... 땀을 너무 많이 흘렸나 싶은데, 그거랑은 다른 느낌... 라일락은 설마 싶었고, 아까보다 두 배로 더 자괴감을 느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지.
그날 라일락은 도저히 요거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또 오늘 요거트는 데이트 일정도 없고 하니까 라일락이랑 요구르카 시내에 나가겠다는 거야. 라일락은 안 그래도 죄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죽을 거 같은데, 그 와중에 요거트 얼굴을 보면 자꾸 꿈 생각이 나서 미칠 것만 같고. 그걸 알 리가 없는 요거트는 하루종일 신이 나서 라일락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이거 해보자, 저거 해보자 난리지 뭐야... 라일락은 최대한 요거트를 안 쳐다보려고 애쓰면서 무슨 정신으로 요거트를 쫓아다녔는지도 모르게 하루를 보냈어...
그날 저녁에야 저택에 돌아온 요거트는 "아, 진짜 재미있었어! 역시 너랑 다니는 게 제일 좋아, 라일락!" 이라고 말하는데, 잠깐 이거 어디서 들어본 말인 거 같은데. 라일락은 불현듯이 꿈 생각이 나서 얼음처럼 굳어버렸어. 그 꿈이, 설마...? 정말 놀랍게도 꿈이랑 똑같이 요거트가 치장했던 옷이랑 장신구를 벗어던지고는 편한 옷차림이 되었지. 라일락은 어쩔줄 모르고 있다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어. "... 나도 즐거웠어." 저절로 꿈이랑 같은 말을 해버린 라일락... 그리고 그 타이밍에, 요거트가 라일락의 팔을 붙잡았어. 너무 놀란 라일락은 그대로 숨을 들이마신채 멈춰버렸지.
"오늘 진짜 고마웠어. 덕분에 너무 재미있었어!" 요거트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어. 아... 그렇지, 모든게 꿈이랑 같을 수는 없지. 라일락은 크게 안도하면서도 내심 꿈과 달라진 현실에 살짝 실망했지. 요거트는 라일락의 팔을 붙잡은 채 한참동안 오늘 있었던 즐거운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는, "다음에 또 나랑 '데이트' 해 줘, 라일락!" 하고 웃으며 굿나잇 인사를 하는 거야... 라일락은 "물론이지." 대답하고 요거트의 방에서 나왔지...
그래, 모든게 꿈이랑 같을 수는 없어. 라일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어쩐지 입 안이 쓰린듯 했지.
5
요거트는 20살이 되었고, 집안에서 운영하는 크고 작은 상단 중에 가장 작은 상단을 물려받게 되었음ㅋㅋㅋ 아무리 막내여도 기본적인 상단 운영 정도는 경험을 해 봐야 한다는 취지에서 말이지ㅋㅋㅋ 혹시라도 장사에 두각이 보이면 집안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과정이었음... 요거트는 후계자가 되는데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운영하게 된 작은 상단에 관심을 많이 가졌음ㅋㅋㅋ
근데 효율적으로 운영하는게 아니라 일단 상단이 뭐든 결과물을 가져오면 너무 후하게 쳐줘서ㅋㅋㅋㅋ 형이나 누나들은 그렇게 하면 돈을 쓰기만 하고 버는게 아니라고 얘기했는데도 요거트는 "다들 수고했으니 이 정도 보상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하면서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일단 보상을 다 줘버림ㅋㅋㅋㅋ 당연히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무지 후하게 쳐주고ㅋㅋㅋㅋㅋ
말로는 늘 "내 상단도 엄청난 보물을 가져올 거라구!" 하고 있지만 요거트는 사실 자기 상단이 작은 것도 알고, 그래서 많은 걸 가져올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음ㅋㅋㅋ 뭐 어차피 대단한 보물이야 아버지 상단이 엄청나게 많이 가져다 주니까 별로 상관 없기도 했고. 약간 자기 상단 운영은 소꿉놀이 같은 느낌? 그래서인지 상단 자체의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은 엄청 좋았음ㅋㅋㅋ 상단에 소속된 상인들도 상당히 의욕적이고 말이지...
그리고 요거트는 이제 사교계 모임에 혼자 나가게 되었음. 형과 누나들이 같이 안 가주겠다고 했거든ㅋㅋㅋ 근데 혼자 나가는 건 너무 심심하잖아... 그래서 요거트는 라일락을 데려가기로 함ㅋㅋㅋㅋ 집안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라일락은 신분이 낮으니 그런 자리에 데려가는 거 아니라고 만류했지만, 아무도 막내 도련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음ㅋㅋㅋㅋ 라일락 본인 마저도 자기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거절했지만 요거트는 막무가내였음ㅋㅋㅋ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교계 데뷔(?)를 하게 된 라일락... 물론 순전히 요거트의 호위 무사 자격으로 가는 거니까 라일락에게 무슨 권한이나 지위 같은 건 아무 것도 없지... 하지만 명색이 요구르카 최고 권력가이자 재벌 가문의 막내 도련님 호위 무사이니까, 요거트는 라일락도 빡세게 치장하고 가야한다고 강조 또 강조함ㅋㅋㅋㅋ 그날은 요거트 자기 치장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라일락 코디에 공을 들일 정도였으니ㅋㅋㅋㅋㅋ
라일락은 이런 상황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음ㅋㅋㅋㅋㅋㅋ 그냥 늘 하던대로 요거트는 사교계 모임에 가고, 자기는 훈련장에 내려가서 훈련이든 대련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ㅋㅋㅋ 요거트가 부득불 자기는 혼자서는 절대 거기 안 갈거다, 그러니 네가 같이 가야한다 붙잡아서... 하지만 걱정이 태산 같지ㅋㅋㅋ 물론 내내 요거트 뒤에만 따라다닐 예정이긴 한데, 그래도 어쨌든 사교계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이니 관심을 받게 되지 않겠어? 그런게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요거트네 가족들이 걱정하는 대로 괜히 요거트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닌지... 그리고 무엇보다 요거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하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감이 안 옴ㅋㅋㅋ 근데 요거트는 그런거 알려줄 생각은 않고 라일락을 코디하는데에만 정신이 팔려있고!
"... 정말 내가 같이 가도 괜찮겠어?" 벌써 수십번은 머리에 달 장식을 바꿔오라고 지시하는 요거트를 향해 라일락이 물었음ㅋㅋㅋ "당연하지~ 너 안 가면 나도 안 갈거라니까?" "... 그럼 그냥 안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라일락." 요거트가 절대 아니라며 거울을 가리키는데, 거기엔 라일락 자기가 봐도 너무 어색한 자기가 들어앉아있지ㅋㅋㅋㅋ "잘 어울려!" 요거트가 어깨를 툭툭 쳐주고 활짝 웃고는, 시종에게는 다른 머리 장식을 가져오라고 시켰지. 라일락은 요거트가 처음 사교계에 데뷔하던 날을 떠올리며 다소 심란한 기분이 되었음...
사교계 모임은 라일락이 예상한 대로 사치와 허영이 넘쳐나는 공간이었음ㅋㅋㅋ 거기 모인 모든 이들이 요거트만큼이나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자신의 재력과 교양을 뽐내는 자리... 그곳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 라일락은 역시 이곳은 자기가 있을만한 곳이 아닌걸 알았음. 자기를 바라보는 눈초리들이 심상치 않았으니... 요거트 가문의 특색인 연보랏빛 머리가 아닌 진한 보라색 머리는 너무 눈에 띄었거든ㅋㅋㅋ... 처음엔 모두들 호기심을 가지고 요거트에게 다가와 옆에 선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고, 요거트는 자신의 든든한 호위 무사라고 소개했지만, 정체를 아는 순간 그중 절반 이상은 라일락을 대하는 눈빛이 곧바로 달라짐. 뭐야, 고작해야 호위 무사잖아. 하는 그런 눈빛.
요거트는 그런 주변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락에 대해 엄청나게 자랑을 많이 함ㅋㅋㅋㅋ 엄청난 무술 실력을 지닌 호위 무사라고ㅋㅋㅋㅋ 옆에 선 라일락은 너무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었음ㅋㅋㅋㅋㅋ 그러자 누군가가 "그 무술 실력이 한번 보고 싶다" 라고 했는데, 요거트는 흔쾌히 좋다고 해버렸지 뭐야ㅋㅋㅋㅋ 얼결에 라일락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술 시연을 하게 됨ㅋㅋㅋㅋㅋ 이런건 예상 못 했는데! 옷도 우선 활동하기에 편한 옷도 아니고ㅋㅋㅋㅋㅋㅋ 하지만 하라니까 할 수 밖에 없었음ㅋㅋㅋ 무엇보다 요거트가 무척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이건 당연히 해 내야만 하는 것이었음.
가지고 온 건 호신용 단검 하나뿐이었지만, 라일락은 저택의 사범님으로부터 어떤 무기든 보통 실력 이상으로 다룰 수 있을만큼 훈련을 꾸준히 받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무술 시연을 할 수 있었음ㅋㅋㅋ 마지막으로 금빛 단검을 표적으로 둔 사과에 정확히 던져서 꽂으며 마무리 지었더니, 단번에 주변에 감탄과 환호가 가득차고 다들 박수를 쳐 줌ㅋㅋㅋ 라일락은 단정하게 옷자락을 정리하고 공손하게 인사까지 마쳤지.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마주한 요거트의 얼굴이 정말 너무너무 밝아져선 "이것 보라구! 역시 내 호위 무사라니까? 대단하지!" 하며 방방 뜨고 있는데, 그걸 보니 라일락도 가슴 한켠이 뿌듯해졌지 뭐야ㅋㅋㅋㅋ
이후로 라일락을 일개 호위 무사라고 무시하는 시선은 좀 줄어들었음ㅋㅋㅋ 뭐 여전히 무술 실력은 대단하지만 천한 신분인건 마찬가지잖아 하는 눈빛들도 있었고, 그 정도는 우리집 호위들도 할 수 있다 이런 거만한 태도인 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라일락을 실력자라고 인정해주는 분위기 였기 때문에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음ㅋㅋㅋ 그러니까 라일락의 사교계 데뷔(?)도 성공적이었던 셈이지ㅋㅋㅋㅋ
그 뒤 요거트는 사교계 모임이 있을 때마다 라일락을 데리고 나갔음ㅋㅋㅋ 처음엔 말렸던 가족들도 라일락이 거기 나가서 크게 사고치는 것도 없고 오히려 굉장히 좋은 이미지라는 얘길 듣고 요거트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뒀고ㅋㅋㅋㅋ 요거트는 이제 사교계 모임이 있는 날에는 자기 코디도 신경을 썼지만 라일락한테 엄청 공을 들였음ㅋㅋㅋㅋ 라일락은 처음 몇번까지는 요거트가 자기에게 신경을 쓰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결국엔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기로 했음ㅋㅋㅋ 요거트는 자기 성에 안 차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고집쟁이니까...
사교계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다보니 은근히 라일락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김... 아가씨들도 있고, 예상외로 남자들도 좀 있고. 마치 팬처럼 기웃거리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요거트에게 다가와서 라일락의 신상에 대해 묻거나, 혹은 진짜로 한번만 만나보고 싶다고 요청하는 이들도 있었는데ㅋㅋㅋㅋㅋ 그때마다 요거트는 "라일락은 내 호위 무사라서 나랑 떨어져 지낼 수 없어~ 미안!" 하고 거절해버렸음ㅋㅋㅋㅋ
요거트는 라일락이 관심을 받을 때마다 좋긴 좋았는데, 은근히 심기가 불편해지는 걸 느꼈음ㅋㅋㅋㅋ 순수하게 라일락의 무술 실력에 감탄하거나, 혹은 자기에게 "잘생기고 실력이 뛰어난 호위 무사를 데리고 다니셔서 좋으시겠어요" 라고 이야기하면 기분 좋았지. 그런데 그걸 넘어서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다거나, 라일락에게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인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음... 머리로는 이해를 하지... 요거트 본인도 18살에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로 정말 많은 관심과 고백을 받았고, 그러다 실제로 교제도 해 보고 했으니까...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참 이상했음... 왜 마음이 불편하지? 요거트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눈썹을 찌푸렸음...
라일락은 차라리 요거트가 자기에 대한 관심을 원천 차단해 주는데에 감사했음ㅋㅋㅋㅋ 만약 누군가가 자기한테 직접 와서 반했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면... 정중히 거절하긴 할테지만 아무래도 그림이 좀 이상하잖아... 상대방은 귀족이고 자기는 일개 호위 무사인데 말이지... 그래서 오히려 요거트가 다 쳐내는게 마음이 편했음ㅋㅋㅋㅋ
그러는 동안에도 요거트 역시 끊임없이 교제 요청을 받았지... 라일락은 오히려 이쪽이 더 신경이 쓰였음... 늘 그냥 요거트가 하는 말로만 이런 상황을 상상했는데, 눈앞에서 지켜보는 건 느낌이 다르잖음? 물론 라일락은 그런 상황일때 서너걸음 뒤에서 모르는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고 있긴 하지만... 귀는 누구보다 활짝 열려서 요거트와 상대방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다 듣고 있었음ㅋㅋㅋㅋㅋ 뭐 정말 순수하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요거트의 명성과 재력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지... 그건 라일락이 듣기에도 티가 많이 났고, 요거트는 그런 이들에겐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음.
그러다 가끔 가뭄에 콩나듯이 요거트가 마음을 받아주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그 상대방과의 만남은 많아야 세 번을 넘어가지 않았음... 아무리 상대방이 요거트에게 잘 대해주고 온갖 선물을 해주고 해도 요거트는 금방 관심이 식어버렸음... 급기야는 상대방이 울며불며 붙잡아도 요거트는 "이렇게까지 나아갈 관계는 아닌거 같아." 하고 냉정하게 쳐내버렸다고...
그걸 지켜보는 라일락으로서는 참 입맛이 썼음... 상대방이 요거트에게 가지는 그 마음이란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라일락은 그때 그 꿈 이후로, 자기가 요거트에게 지닌 마음이 보통의 주인과 호위 무사의 관계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해 버렸거든. 그러니 요거트에게 가차없이 차이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걸 넘어서 거기에 자신을 대입해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쓰려서 견디기가 어려웠지...
이러다보니 사교계에서 요거트의 명성은 여전히 드높았지만 정말 입맛이 까다로운 도련님이 되고 말았음ㅋㅋㅋㅋ 절벽 위에 핀 꽃마냥 닿기도 어려운 존재... 도대체 누가 저 콧대 높은 도련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요거트가 누군가에게 고백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런 예상을 해 댔고ㅋㅋㅋㅋ 곧바로 차이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는 모습을 보며 이번에도 역시~ 라는 반응을 보였지. 라일락은 요거트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주지 않는데엔 내심 안도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엔 역시 그 상대방에게 자기를 투영하고 있어서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음...
그런데 이 모든걸 깬 이변과도 같은 존재가 나타났지. 바로 먼 나라로 이사 가버렸던 요거트의 첫번째 연인이 다시 요구르카에 돌아온 것이었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라일락조차도 상상하지 않았던 광경. 그 아가씨는 요구르카에 돌아오자마자 요거트를 찾았고, 요거트 역시 그 아가씨를 보고 너무 놀랐단 말이지ㅋㅋㅋ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시 연인이 되었음.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으니 그만큼 각별했던 것이었지...
요거트는 첫 연애에 공을 들였던만큼이나 두번째 재회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음ㅋㅋㅋ 이제는 사교계 모임에 나가는 것보다 자신의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날이 더 많아짐... 요거트가 데이트를 나갈 땐 라일락은 따라가지 않고 저택에 머물렀음. 사교계 모임과는 다르니까, 지극히 도련님의 프라이버시인 상황이니까 말이지. 그래서 라일락은 늘 그랬던 것처럼 훈련장에 내려갔고, 거기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음... 그러다보니 어느새 무술 실력으로는 사범님과 앞뒤를 다투는 실력자가 되었고...
물론 여전히 요거트는 자신의 데이트 현황에 대해 라일락에게 소상히 밝혔음ㅋㅋㅋㅋ 오늘은 어디를 갔다, 무엇을 먹었다, 어떤 이야기를 했고, 그때의 감정이 어땠는지 말이지. 라일락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행복해하는 요거트를 상상하고는, 그 옆에 자신을 대입해 보려 했지만 슬프게도 거기에 자기가 낄 자리가 없는 걸 알았음... 이 작은 연인들의 관계는 너무나도 돈독해서, 거기에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음을...
하루는 요거트가 데이트를 하고 돌아와서는 기분이 무척 들뜬 것처럼 보였는데, 늘 하던대로 라일락을 부르지 않고 방에 콩 들어가 버렸음. 라일락은 이건 또 무슨 일일까 궁금했는데, 요거트가 자기를 부르지 않으니 차마 먼저 들어가볼 수도 없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걸 보면 나쁜 일은 아닌것도 같은데... 라일락은 괜히 요거트가 신경이 쓰여서 요거트의 방 근처를 서성거렸음ㅋㅋㅋㅋ 그러다 오늘은 요거트가 자길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훈련이나 해야겠다 싶어서 뒤를 돌았는데, 그 타이밍에 요거트가 방 문을 열고 "라일락!" 하고 불렀단 말이지.
"라일락, 오늘은 진짜 특별한 날이야." 요거트가 싱글벙글하며 베개를 꾹 끌어안은 채 엎드려 누웠음ㅋㅋㅋㅋ "내가 뭐 했는 줄 알아?" 당연히 모르지. 라일락은 고개를 가로젓다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음. 바로 직전에 요거트가 무슨 말을 할지 먼저 알아버린 그 느낌... "나 오늘 드디어 키스 해봤어!" 요거트가 활짝 웃으며 말하고는 부끄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지ㅋㅋㅋ 그 순간 라일락은 심장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음.
"... 그렇구나." 분명 축하해야 할 일이었는데, 라일락은 도저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음... 표정도 좀 더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입꼬리가 굳어서 올라가질 않는 거야. 요거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아니~ 그때 어떻게 된거냐면!" 하고 쫑알쫑알 끝없이 이야기하는데... 그 말들이 전부 한쪽 귀로 들어와 의미 없이 흘러서 반대쪽 귀로 나가는 것만 같은 착각... 라일락은 요거트의 이야기에 하나도 집중할 수가 없었음...
"... 그랬다니까! 진짜 기분 좋았어. 그러니까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해봐. 이 형님이 아주 자세하게 다 얘기해 줬으니까 말이야!" 요거트가 아주 흐뭇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하는데, 라일락은 착잡한 기분으로 대답했지. "그래." 하고... 달리 할 말이 없었어.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할 말이 있겠어? "라일락? 너 유난히 기운이 없는 거 같아." 그제야 라일락이 좀 시무룩해 보이는 걸 깨달은 요거트가 몸을 일으켜 라일락을 쳐다봤는데, 라일락은 그냥 훈련을 좀 오래했더니 피곤해서 그런거 같다고, 먼저 가서 쉬겠다고 말하고는 요거트의 방을 나섰지.
조용히 방 문을 닫고 나온 라일락은 갈피를 잃었어. 어디로 가야할까?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니 이 울적한 기분이 거기까지 따라올 듯 했고, 훈련장으로 가자니 이런 기분으로는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라일락은 스스로 갈 길을 궁리하다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어. 그리고는... 그냥 정처없이 걷기로 했어. 어차피 답도 안 나오는데.
그 뒤로 요거트와 그 아가씨의 관계는 정말 급물살을 탔어. 누가봐도 다정한 연인처럼. 그러다보니 양쪽 집안에서는 둘의 관계가 무르익었으니 정식으로 혼담을 나누어도 좋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몇번인가 서로 오가며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음ㅋㅋ 그리고... 정말로 둘을 결혼시키기로 했어. 하지만 아직 둘다 나이가 20살 남짓이라 어렸기 때문에 결혼은 좀 더 뒤에, 그러니까 2년 뒤에 올리기로 했지.
요거트가 연인과 약혼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기에, 집안 어른들은 라일락을 불렀어. 라일락 역시 요거트를 따라다니며 보좌하느라 적잖히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집안 어른들이 자기만 따로 불러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집안 어른들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는 거야... 바로 라일락더러 집안 시종 중에 괜찮은 처자를 골라 결혼을 하라는 이야기였지.
너무 뜬금없는 제안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일락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황스러운 제안에 목소리가 떨릴 정도였지. 집안 어른들은 라일락이 모시는 도련님- 요거트가 약혼식을 하고 나면 약혼자인 아가씨가 이 저택에 자주 오게 될 것이고, 어쩌면 둘을 별채에 두고 계속 지내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혹시라도 라일락이 그 아가씨에게 허튼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 라일락은 기가 차서 어이가 없었어. 그 아가씨에게 관심은커녕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사이인데 말이야.
라일락은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어. 자기는 도련님에게 충성을 다 하고 있으니, 도련님을 실망시킬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집안 어른들은 라일락이 요거트에게 굉장히 충성스러운 시종인건 잘 알고 있지만 상황은 언제든 급변할 수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라일락에게 먼저 배우자를 들이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했어... 이런 상황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싫었지만 라일락은 어쩔 수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지...
요거트의 약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이루어졌음. 요구르카의 저명 인사들이 모두 와서 요거트 집안 막내 도련님의 약혼식을 축하해 주었지. 그 자리에서 요거트와 아가씨는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약속했어. 누구보다 반짝이고 사랑스러운 연인이었지. 거기에서 라일락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저 요거트가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그날밤까지 저택에서 성대한 연회가 이어졌어. 그리고 라일락은 집안 어른들이 제안했던대로, 저택에서 일하는 여시종들 중에 그나마 괜찮은 이를 골라 동침을 하게 되었지. 오며가며 몇 번인가 마주쳤던 여시종이었는데, 늘 그에게 보내는 시선이 어지간히 흠모하는 모양새라 기억에 남아 있었던지라 그녀를 선택했을 뿐이야. 라일락은 무겁게 가라앉은 한숨을 내쉬었어.
집안 어른들이 마련해 둔 방에는 여시종이 먼저 와 있었어. 그녀는 벌써부터 붉게 물든 얼굴로 라일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라일락은 무덤덤한 얼굴로 방에 들어갔고,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마주보았어. 그리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어. 가능할 리가 없었지. 어떻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입을 맞출 수 있겠어? 라일락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지만 얼음처럼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여시종은 라일락이 자기에게 키스해주지 않아 조금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래도 괜찮다며 먼저 옷을 벗었어. 그녀 역시 시종인 신분이었지만 아주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가 돋보이는 여성이었고, 굉장히 매력적인 몸매의 소유자였지. 하지만 라일락은 그녀에게서 어떤 흥분이나 이렇다할 감정을 느끼지 못했어... 심지어 처음보는 여성의 나체였는데도 말이야. 여시종이 라일락의 뺨에 손을 얹고 부드러이 어루만졌지만, 라일락은 눈을 지그시 감았을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어. 아니, 할 수 없었지... 앞에 있는 상대는 자기가 그토록 마음에 품었던 그가 아니었으니까.
여시종은 두어번 더 스킨십을 시도했지만 라일락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포기하고 말았어. "당신은 나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네요." 그녀는 아주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그 말을 남기고 먼저 방을 나가버렸어. 혼자 남겨진 라일락은 그제야 감았던 눈을 떴지.
창밖으로는 이제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있었고, 라일락은 창가로 향했지. 그리고 밖을 내다봤어. 정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들을 올려다 보고 있었고, 그 중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요거트와 약혼녀가 있었어. 가장 화려한 옷을 입었으니 단연 눈에 띄었지. 라일락의 눈은 저절로 요거트에게 가서 붙박인듯 머물렀어. 요거트는 약혼녀에게 저길 보라며 손짓하고는 함께 불꽃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어. 그러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약혼 반지 위에 입을 맞추었고. 약혼녀가 부끄러운듯 입을 가리며 웃고는 요거트를 마주봤어. 요거트는 그녀를 무척 사랑스러운듯이 바라보다 그대로 입을 맞추었지. 그걸 누군가가 발견하고는, "요거트크림 도련님의 약혼식을 축하합니다!" 하고 외치니까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 주었어. 입맞춤이 끝난 뒤에 요거트도 약혼녀도 부끄러운듯이 막 웃어버렸지. 둘은 무척 행복해 보였고...
라일락은 박수를 칠 수 없었어.
6
약혼식을 올린 뒤, 요거트는 약혼녀와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음ㅋㅋㅋ 둘은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다시피 했는데, 정식으로 약혼을 올린 사이이니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ㅋㅋㅋ 다들 좋을때다~ 하고는 진짜 결혼을 하고 나면 그렇게까지 각별하지 않을테니 지금을 즐기라고 놀렸음ㅋㅋㅋㅋㅋ 형이랑 누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요거트는 자기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 했는데, 아무도 안 믿는 눈치였음ㅋㅋㅋㅋ
라일락은 여전히 두어 걸음 떨어져서 요거트를 지켜봤음.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요거트는 약혼식을 올렸지만 그걸로 라일락과의 관계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요거트는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자 자신의 주인이었고, 라일락은 그에게 귀속된 시종이자 호위 무사니까. 가끔은 요거트 곁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요거트가 그걸 허락할 리가 없으니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음... 그저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킬뿐...
요거트가 있는 자리엔 늘 웃음이, 밝은 햇살이 넘쳐나는 느낌이었지. 그리고 라일락은 자기가 차마 그 햇빛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그늘자리 경계선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 햇빛에 손을 뻗고 싶지만 그랬다간 자기는 흔적도 없이 타버릴 것을, 라일락은 알고 있었어.
집안 어른들은 라일락이 요거트의 약혼식날 밤에 여시종과 동침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걸 알고 있었음. 그래서 그 뒤로 몇번 더 라일락에게 다른 여시종을 붙여주려고 했지만 라일락은 그 어떤 시도에서도 그녀들에게 손 하나 댈 수 없었지. 결국 집안 어른들도 포기하고 말았어. 그냥 라일락의 충성심이 남다르구나 인정하고 말이지.
요거트의 약혼녀는 무척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음. 라일락이 보기에도 그랬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고, 웃는 얼굴이 아름다운 사람. 그 모습이 요거트와 많이 닮았고, 그래서 둘이 잘 어울리는구나 하고 라일락은 실감했지. 그렇기 때문에 요거트가 저 아가씨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약혼녀는 라일락에게도 무척 잘 대해 주었음. 요거트가 라일락을 10살때부터 자기 옆에서 자기를 든든하게 지켜준 이라고 소개했으니까 말이지. 약혼녀는 "이렇게 철없는 도련님을 10년이나 보좌하시다니, 라일락 호위 무사님은 정말 대단히 인내심이 깊은 분이시군요!" 하고 호호 웃었어. 요거트는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하고 화를 내는 척 했지만 만면에 가득한 미소가 너무 행복한 그것이었어.
라일락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고 싶어 뒤로 물러나려 했는데, 약혼녀가 먼저 손을 뻗어 라일락의 손을 꼭 잡았어. "고마워요, 호위 무사님. 사실 도련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덕분에 목숨을 많이 건지셨다고 했어요. 제가 다 감사하네요.... 앞으로는 저도 도련님 곁에서 보필할테니, 같이 힘 내봐요." 작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은 무척 따뜻했고, 활짝 웃으며 라일락에게 건네는 말 조차도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데, 거기에 라일락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지.
요거트가 약혼식을 올린지 1년이 지났어. 그들은 여전히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한 일만 있었어야 했지.
그날은 드물게 요구르카에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어. 요거트의 약혼녀는 오늘은 친정에 일이 있어 요거트에게 바로 오지 못한다고 알려왔어. 그녀의 아버지가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거든.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의 몸 상태가 더 편치 않다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요거트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다소 무료한 시간을 보냈어. 늘 약혼녀가 옆에 있었는데 오늘은 혼자잖아. 그러니 심심할만 하지. 그래서 요거트는 라일락을 불렀어. 아주 오랜만이었지.
라일락은 비가 와서 훈련장에는 내려가지 않았고, 방에서 무술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지. 10살에 요거트가 가르쳐 준 글자는 상당히 쓸만했음ㅋㅋ 라일락은 아주 어려운 내용은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지만 간단한 책 정도는 무리없이 읽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비가 오거나 모래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훈련을 하러 나가지 않고 책을 읽곤 했지. 어쨌든 시종이 와서 도련님이 부른다는 말에 라일락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요거트의 침실로 향했어.
요거트는 간만에 편한 옷으로 풀어진 채 창틀에 걸터앉아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고 있었음. 라일락은 그걸 보자마자 혀를 차고, 요거트의 팔을 잡아 창틀에서 내려놨어. "위험하니까 창틀에는 앉지 말라고 했잖아."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 너무하네." 요거트는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라일락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창틀에서 내려왔지ㅋㅋㅋ
"그분은?" 요거트가 약혼녀와 함께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챈 라일락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어. 요거트는 오늘 그녀는 일이 있어 늦게 온다고 얘기하고는 편하게 침대에 걸터앉았음ㅋㅋㅋ 요 근래 둘이 한시도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요거트 혼자 있는 걸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울 정도였지. 라일락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작은 의자를 끌어다 요거트 곁에 앉았어. 요거트가 그 모양을 보고 소리내서 웃었지. "옛날에 너한테 맨날 연애 상담하던 때 같다." 하고.
"그때 너한테 진짜 별별 얘기를 다 한 거 같은데. 그치?" 요거트가 킥킥 웃고는 손을 내저었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무지하게 부끄럽네. 뭐하러 너한테 다 얘기했을까? 너도 모르는 것투성이였을텐데." "... 뭐, 들을만 했어." 라일락은 짧게 대답했고, 요거트는 킬킬 웃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어. "새삼스러운데, 고마워, 라일락."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라일락이 요거트에게 시선을 옮겼어. 요거트는 제가 말해놓고 부끄러운듯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지.
"그냥..., 진짜 새삼스러운데, 온통 너한테 신세진 것밖에 없는 거 같아서." 요거트가 팔을 뻗어 라일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음. 그 손길이 가볍고도 부드럽고 따뜻한데, 라일락은 조용히 눈을 감았어.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 물론이지." 라일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
"아, 그러고보니 나만 이렇게 결혼할 게 아니라 너도 연애 상대를 찾아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요거트가 생각난듯 말했어. 라일락은 감았던 눈을 떴지. 요거트가 사뭇 진지한 눈으로 라일락을 쳐다봤음... "너도 벌써 21살이잖아. 사교계에서 너한테 교제 요청하고 싶어서 나한테 물어보는 사람도 엄청 많았는데, 그중에 괜찮은 사람이랑 한번 사귀어 보는 건 어때?" "......." 라일락은 할 말을 잃었음... 하긴, 요거트가 자기 맘을 어떻게 알겠냐마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집안 어른들이랑 똑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라일락은 집안 어른들이 자기한테 했던 제안을 요거트에게 말할까 하다가.... 이런 사실을 알면 요거트 성격에 절대 가만 있지 않고 집안 전체를 한번쯤 들었다 놓을 거 같아 그냥 입을 다물기로 함... 그리고 지금 요거트가 자기의 연애 상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이야기는 반쯤 흘려듣기로 했지.
"흠, 근데 이상형이 뭔지 알아야 좀 도움이 될거 같은데." 요거트가 진지하게 라일락에게 얼굴을 들이댔어. "빨리 말해봐. 내가 네 이상형이랑 비슷한 사람이 있는지 한번 찾아볼게." 이상형이라고? 라일락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음ㅋㅋㅋ... 이상형이라니, 그거야 당연히 눈 앞의 너잖아. 그런데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라일락은 난감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뒤로 한걸음 물러났음; 근데 이 눈치 없는 요거트는 라일락 팔을 덥석 잡고는 빨리 말해보라며 재촉하는 거야; "그..., 러니까..." 라일락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는데...
"도련님!!" 밖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와 요거트를 찾았어. 비가 오는 밖에서 온 모양인지 시종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서 왔는데 그야말로 산발이야. 요거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지. 하지만 시종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중에도 급한 소식을 전했어.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지. 길이 아주 미끄러웠고, 까딱하면 사람도 마차도 미끄러져 큰 사고가 날법한 그런 날씨.
저잣거리는 엉망이었고,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지. 라일락은 요거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지만, 요거트는 그 아래에서 벗어나 세찬 비를 맞으며 앞으로 걸어갔어. 핏자국은 없었어. 비에 모조리 씻겨나간 듯이, 혹은 사람들이 깨끗하게 닦아 놓았는지도 몰라. 빗속에 가지런히 누운 그녀는 창백했고, 요거트가 이름을 불러도 눈을 뜨지 않았어.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비가 내렸어. 하늘이 맑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 요구르카의 모든 이들이 적어도 한 번씩은 그 자리에 왔어. 그리고 모두가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에게 위로를 건넸지만, 검은 터번에 목 끝까지 꽉 채운 검은 상복을 입은 요거트는 누가 와서 말을 걸어도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지. 다들 요거트가 약혼녀의 죽음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아 그런 것임을 알고 그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애도만 표하고 지나갔어.
오로지 라일락만 그의 곁에서, 그가 지칠 즈음엔 어깨를 내어 조금이라도 잠을 잘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그가 목이라도 축일 수 있게 물을 가져다 주고,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게 음식을 떼어 먹였어. 요거트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어느 누구의 시선과 손길도 모두 거부했지만, 라일락의 손길만큼은 겨우 받아들였어.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저택에 돌아와서도 요거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방 문을 걸어 잠갔어. 이미 식 중에도 요거트는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는데, 저택에 돌아와서도 식사를 전혀 하지 않았어... 시종들은 이러다 도련님도 돌아가시겠다고 걱정이 태산같아.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지. 형들, 누나들이 돌아가며 요거트 방에 다녀갔지만 요거트는 어느 누구에게도 방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 급기야 노쇠한 아버지도 왔지만 마찬가지였지.
라일락은 굳게 닫힌 요거트의 방 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었어. 고작 방 문 하나뿐이고, 라일락이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여는 건 무리가 없는 정도인데, 라일락은 그러지 않았어. 물론 요거트가 걱정이 됐지... 요거트는 벌써 일주일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요거트가 느낄 상실감의 크기가 얼마나 클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으니, 섣불리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라일락은 매일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조용히 일어나 요거트의 방 문 앞을 지켰지.
고요히 가라앉은 새벽이었고, 지독한 장마가 지난 뒤에 날씨가 꽤 서늘해져서 새벽 공기는 차가운 편이었음... 라일락은 망토를 두르고 똑같이 요거트의 방 문 앞에 서 있었어. 오늘도 열리지 않으려나. 이러다 요거트가 안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면 어쩌지... 싶었는데, 아주 조심스럽게 방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어. 사방이 아주 조용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라일락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어두운 방에서 요거트가 매우 수척한 얼굴로 서 있었어.
"... 라일락..." 너무나도 마른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짓에 라일락은 얼른 문을 열고 요거트를 받쳐 안았어. 요거트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그의 품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지... 잘못 손대면 그대로 요거트가 부스러질 것만 같아서, 라일락은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요거트를 안아 올렸어. 그리고 침대에 데려다 놓은 뒤에,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선 급히 주방으로 달려갔지. 라일락은 급히 주방 식기를 뒤적여 요거트가 삼킬 수 있을 만큼 무른 음식과 미지근한 물을 챙겨서 돌아왔어.
라일락이 다시 요거트의 방에 돌아왔을 땐 요거트는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어. 라일락은 우선 요거트에게 미지근한 물을 천천히 먹였지. 급하게 음식부터 먹이면 큰 탈이 날것 같아서 말이야. 요거트는 처음에 물도 마시지 않으려는 듯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라일락이 간청을 거듭한 뒤에야 겨우 입을 열어 물을 마셨어. 마른 사막에 물을 붓듯, 한번 물을 마시니까 목이 트인 모양인지 요거트는 물을 여러 잔 마셨어. 라일락은 혹시라도 요거트가 탈이 날까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레 물잔을 건넸지...
요거트가 물을 다 마신 뒤에, 라일락은 요거트에게 아주 묽은 미음을 내밀었어. 요거트는 기운 없는 눈으로 그것을 슥 훑어보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았어... "요거트크림..." 라일락이 다시 간청했지. "먹어야 살아. 너무 오래 굶었잖아." "... 먹고 싶지 않아." 물을 그렇게 마셔댔지만 여전히 깊은 갈증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요거트가 고개를 가로저었어... 라일락은 그래도 요거트에게 음식을 내밀었지. "... 안 먹으면 네가 죽어." 그 말에 요거트가 고개를 숙였어.
"... 차라리 죽고 싶어." 고개를 숙인채 요거트가 들릴듯 말듯 중얼거렸어. 라일락은... 들었던 수저를 내려놓고 가만히 요거트를 바라보았지... "이대로 죽으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요거트가 덮은 이불 위로 툭 툭 눈물 방울이 떨어져 자국이 번지는데, 그것이 떨어질 때마다 라일락의 마음도 무너지는듯 했어... "왜...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마음을 후벼파는 듯해서 라일락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어.
"그런 소리는 하지 마." 다시 눈을 뜬 라일락은 기운 없이 쥔 요거트의 주먹을 꾹 잡았어.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면, 그분은 행복했을 거 같아?" 요거트는 대답이 없었어... "그리고 그분은 네가 죽는 것도 원치 않을 거야. 당연한 거 아냐?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나도 마찬가지고. 라는 말이 그대로 튀어나올 뻔 랬지만 라일락은 꾹 눌러 참았어. 다행이었지.
요거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았지만 기운도 없고 무엇보다 체력이 망가져서 숨이 찬 모양이었지... 라일락은 다시 요거트에게 음식을 내밀었어. 요거트는 역시 입을 굳게 다물었지만... 라일락도 포기하지 않았지.
한참을 기싸움을 한 뒤에야 요거트가 겨우 입을 열었어. 아주 조금. 라일락은 천천히 벌어진 입 안으로 음식을 흘려 넣었고... 요거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걸 받아먹었어. 겨우 한 숟갈을 삼켰을 뿐인데 요거트는 적잖이 괴로워했어. 두번째 숟갈은 반도 삼키지 못하고 구역질을 해 버렸고... 라일락은 요거트의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미음을 닦아주고, 침착하게 다시 요거트에게 음식을 내밀었지.
요거트가 음식을 다 먹는데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 라일락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차분히 요거트가 음식을 다 받아 먹을 때까지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했지. 겨우 그릇이 다 비워진 뒤에 라일락은 빈 그릇을 옆에 내려두고, 조심스레 요거트에게 다가가 등을 살살 쓸어주었어. 혹시라도 먹은게 체하면 곤란하니까 소화에 조금 도움을 주려고 말이야. 얇은 잠옷 가운 아래로 앙상하게 마른 등이 느껴지는데, 그것만으로도 라일락은 마음이 무거워졌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으면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혹사시킨거야...
요거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어... 푸석해진 머리카락이 힘없이 등이며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고... "... 라일락..." 라일락의 손길 사이로 요거트가 아주 작은 목소리를 냈어. "내가..., 그녀 없이 살 수 있을까?" 잠시 요거트가 숨을 골랐어. "아니, 그녀 없이 살아도... 되는 걸까...?" 작은 등이 조금씩 움찔 거렸어... 요거트가 다시 울기 시작한 거지. 라일락은 등을 쓸어주던 손길을 멈추었고.
"... 다시 말하지만, 그분은 네가 죽길 원치 않을거야." 라일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요거트 앞에 마주 앉았어. 요거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 다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요거트크림... 그분이라면 네가..., 다시 일어서서, 어떻게든 살아가길 바랄거야. 적어도 내가 봐 왔던 그분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건 라일락의 소망이었어. 어떻게든 살아. 적어도 내 앞에서는 죽겠다는 말은 하지 마...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요거트는 고개를 들었어... 짙은 밤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라일락을 바라봤지. 아직도 멈추지 않은 눈물이 야윈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데, 그걸 보는 라일락은 가슴이 쓰려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어. 요거트는 라일락의 손에 볼을 기대고 눈을 감았어... 젖은 긴 속눈썹 아래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이대로 계속 울다가는 요거트가 탈진할 것만 같아 라일락은 걱정이 되었지.
"라일락,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누군가의 죽음, 특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요거트는 이 모든게 너무 견디기 어려웠음... 그녀가 죽은 건 분명한 사고였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게 다 자기 잘못인것만 같은 거야. 그날 차라리 그녀에게 여기로 오지 말라고 했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니, 아예 요거트가 같이 그 저택으로 갔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테지. 결과적으로 그녀는 요거트를 보러 오려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끝없이 자괴감이 밀려오고, 눈을 감으면 자꾸만 빗속에 누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괴롭고, 목이 꽉 막혀서 음식을 삼키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데, 그럼에도 자기는 살아있는, 자기만 살아있는 현실이 너무 싫은거야. 그래서 요거트는 차라리 죽고 싶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죽는게 두려웠어.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방 안에 갇혀 있었던 거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해? 요거트는 누군가에게 그걸 묻고 싶었어. 그런데 누구에게 물어봐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물어본다고 한들 어떤 답이 나올지 그것마저 두려웠어... 늘 제 옆에 있던 따스한 손길, 햇살같은 미소, 사랑스러운 연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에게 이걸 물어봐야 해?...
"너는 살아야 해, 요거트크림." 요거트의 두 뺨을 감싸쥔 채 라일락이 다시 말했어. "그 사고는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너는 아직 살아있잖아.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아. 다들 네가 살아있길 바라. 네가 죽으면 더 많은 이들이 슬퍼하게 될거야." 라일락이 힘주어 속에 있던 말을 토해냈지. 요거트는 그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멈추지 못했어... 사실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몰라. 정말 죽을만큼 괴로웠지만, 제발 살아달라고 누군가가 붙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거지.
요거트는 대답 대신 라일락의 손 위로 얼굴을 기댔어. 두 손에 무게가 실리자 요거트가 앞으로 쓰러질게 걱정이 된 라일락은 얼른 두 팔을 뻗어 요거트를 감싸 안았고, 제 어깨에 요거트가 머리를 기댈 수 있도록 했어. 요거트는 라일락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눈물을 삼켰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 라일락은 가만히 요거트의 등을 쓸어주었지.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누군가의 온기에 요거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어... 이제는 이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내려놔도 괜찮은 걸까? 하고...
요거트가 겨우 제 품 안에서 안정을 되찾고 잠이 들자 라일락은 등을 쓸어주던 손길을 멈추었어.
요거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그를 침대에 눕혀두어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 처음으로 그를 품에 안은 거야. 라일락은 이럴 상황이 아닌 걸 알았지만, 정말로 그를 놓고 싶지 않았어. 조금만 더, 요거트를 제 품에 가지고 싶었어. 라일락은 조금 더 힘 주어 요거트를 끌어 안았지.
사람이라는게 참 간악하지. 라일락은 저 스스로에게 혀를 찼어. 요거트를 위로하려고 들어온 건 맞아. 그가 안쓰러워서 돌봐주고 싶었고, 지탱해 주고 싶어서 온게 맞았다고. 하지만 정작 요거트가 이렇게 자기 품에 안겨들어오니, 그 이면에 숨어있던 것들이 고개를 들었어. 이대로 약해진 요거트의 마음 한 구석을 파고들면, 정말 그에게도 기회가 한번쯤은 주어지지 않을까? 닿으면 타버릴듯한 햇살이 구름에 가려졌으니, 손을 뻗어 잡아보려 해도 되지 않을까? ...
깊은 잠이 든 듯 요거트가 가늘지만 편안한 숨을 내쉬었어. 라일락은 요거트의 뒷머리에 손을 뻗어 고개를 받치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 요거트를 침대 위에 눕혔지. 손에 감기는 머리칼이 전에 없이 푸석하고, 잠든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어. 며칠을 식음을 전폐해 야윈 뺨 위에 라일락은 손을 가져갔어...
두어번 그 뺨을 어루만지던 라일락은 손가락을 뻗어 요거트의 마른 입술을 쓸었지. 생기를 잃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입술이야. 라일락은 그 입술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다... 결국 허리를 숙여 그 위에 제 입술을 맞대고 말았어. 거친 입술이 맞닿는 순간 입 안에서 쓴 맛이 났지.
"......." 이건 미친 짓이야. 라일락은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세웠어. 그리고 이불을 끌어다 요거트에게 잘 덮어주었지.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요거트의 방에서 나왔어. 주변엔 아무도 없었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가슴이 쿵쾅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지는 듯 했지. 라일락은 망토를 끌어올려 제 얼굴을 가렸어. 그리고 어둠에 잠긴 자신의 방으로 향했지.
7
그 뒤로 요거트는 다행히 방 문을 열고 나와 천천히 건강을 회복했음. 당분간은 사교계 모임은 나가지 않기로 했고, 건강 회복에만 전념하기로 했어. 사교계 모임은 나가봐야 이래저래 구설수에만 오를 것이고, 그러면 정신적으로도 많이 피곤해질게 뻔했으니까.
대신 요거트는 이제껏 별로 관심 없었던 상단 운영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게 되었음. 요거트가 가진 상단은 여전히 작았고, 성과도 그닥 있지 않았음ㅋㅋㅋ 이 상단이 교류하는 도시도 워낙 작은 곳이다보니ㅋㅋㅋㅋ 그래도 여전히 요거트는 상단의 상인들에게 대단히 잘 해주는 편이었음ㅋㅋㅋ
그러던 어느 날, 상단에서 그쪽 도시에 널리고 널린 것이라며 좀 희한한 작은 열매를 가지고 왔는데, 과육은 별로 없으면서 씨가 잔뜩 들어있고... 여튼 요구르카에서 보기 어려운 열매였거든. 누가 봐도 딱히 상품 가치가 있을 거 같지 않은 그런... 근데 요거트는 그 열매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 별로 있지도 않은 과육을 또 굳이 먹어보고 했단 말이지ㅋㅋㅋ 맛은 드럽게 없는데 향이 꽤 좋아. 그래서 이걸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라일락이 그럼 씨를 말려서 갈면 향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냈어. 요거트는 옳다구나 싶어 시종을 시켜서 라일락이 말한 대로 열매를 깨끗하게 씻은 뒤에, 과육이랑 씨를 분리해서 햇빛에 쨍쨍 말리고는 갈아서 가루로 만들었지.
그랬더니 향이 더 진해진거야. 이걸 어디에 쓰면 좋을까, 요거트와 라일락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어. 라일락은 향이 좋으니 방향제나 향수로 사용하면 어떨까 제안했는데, 요거트는 요리에 향신료로 넣어보자 했단 말이지? 우선은 둘 다 해봤음ㅋㅋㅋ 근데 향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아서, 아무래도 향수의 재료로 사용하기엔 좀 무리였어. 하지만 요리에 넣으니 생각보다 풍미가 확 사는 거야! 이 향신료를 넣은 요리를 요거트도 라일락도 먹어봤는데 꽤 괜찮아. 시종들에게도 시험해 봤는데 다들 나쁘지 않대. 고기 요리 잡내를 잡아주는게 좋다나 뭐라나? 그래서 요거트는 가족들에게도 이 향신료를 넣은 요리를 대접해 봤어. 그랬더니 가족들 반응도 괜찮은거야!
이것이 새로운 사업 아이템의 발견인가! 요거트는 신이 나서 자신의 상단에게 이 열매를 잔뜩 가져오라고 주문했지ㅋㅋㅋ 상단은 어차피 그 도시에 널린게 이 열매가 열리는 나무이니까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고 했어. 얼마 뒤에 상단은 열매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돌아왔고, 요거트는 시종들을 시켜서 열매에서 씨를 분리한 다음에 말려서 죄다 향신료 가루로 만들었지.
가족들에게 반응이 좋았으니, 이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요거트는 아주 오랜만에 사교계 모임에 나가기로 했어. 하지만 일부러 화려한 복장은 피했어. 짙은 보랏빛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나타난 요거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어. 약혼녀가 죽은 뒤로 요거트가 사교계에 전혀 나타나지 않아서, 그 도련님은 이제 평생 죽은 약혼녀를 그리워하며 살려나보다~ 하고 있었거든. 사고의 원인도 뭐, 여러 가지로 변조되어 소문으로 떠돌곤 했는데 당사자가 사교계에 나타나질 않으니 진위를 확인할 길도 없이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고 말이야.
어쨌든 요거트가 오랜만에 사교계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어. 특히 약혼녀의 죽음 이후 요거트가 어떻게 지냈는지 다들 궁금해 하는 눈치였는데, 요거트는 일부러 그런 쪽이 궁금해서 다가오는 사람들은 무시해 버렸어. 한참만에 겨우 털어내고 왔는데 또 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고, 거기서 무언가 빌미를 주면 밑도 끝도 없이 그들에게 휘말릴 것 같아서 말이야.
요거트는 대신 자기가 가지고 온 향신료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어. 가십거리를 하나라도 주워가려고 모인 사람들은 요거트가 내민 수상한 가루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좀 관심있게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하는 거야. 그래서 요거트는 연회에 차려진 음식에 자신있게 그 향신료 가루를 뿌려보았지.
다들 저런 가루로 음식 맛이 얼마나 달라지겠냐며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는데, 맛을 본 사람들이 생각보다 독특한 풍미가 마음에 든다고 평하기 시작하자 무시하던 사람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 그러더니 결국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한번씩 음식을 맛보고는, 생각보다 꽤 괜찮다! 라는 평을 내렸지ㅋㅋㅋ 물론 호불호가 약간 갈리기는 했는데, 대부분이 호 의견을 냈거든. 그것만으로도 요거트는 됐다 싶어 당장 그 도시와 정식으로 거래를 하기로 했지.
집안 가족들은 처음엔 막내가 머리가 돌아버린 줄 알았어ㅋㅋㅋ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일주일을 내리 굶고 물 조차 마시지 않더니,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와서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고... 제가 운영하는 작은 상단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가 싶더니, 별로 가치도 없어 보이는 열매 하나를 가지고 이것저것 해보지를 않나... 물론 그 열매로 만든 향신료는 가족들 취향에도 꽤 맞는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거 하나만 믿고 도시와 거래를 한다고? 사교계에서 반응이 괜찮았다고는 해도 확실하지 않은 사업 아이템인데 무턱대고 거래를 확장하는게 썩 좋은 건 아닌 거 같아서, 몇몇 형과 누나들이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요거트를 말렸지만 요거트는 막무가내였어ㅋㅋ 이거야말로 대박이 날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
요거트는 상단이 가져오는 열매를 별채(어차피 요거트 대저택엔 널리고 널린게 별채였으니 하나쯤은 그냥 써도 상관 없는 정도였다)에 가득 쌓아두고, 거기에 시종 몇몇을 상주하게 두고는 같은 방식으로 계속 향신료를 만들게 했어. 그리고 향신료의 재고가 어느정도 쌓이게 되자, 형님이 운영하는 상회에 그 향신료를 내놓고 팔도록 했지. 상회 한쪽 구석을 내준 형님은 그냥 좋은 마음으로 막내가 소꿉장난을 하나보다~ 하는 투로 자리를 내 준 거였음ㅋㅋㅋ 이러다가 장사가 잘 안 되면 적당히 그만 두겠지... 하는 마음이었다고. 사업 실패도 사업가에겐 좋은 경험이니까 말이야.
처음엔 역시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어ㅋㅋㅋ 첫 전시를 한 일주일에 그 향신료를 사간 사람은 두 명 뿐이었어ㅋㅋㅋㅋ 서민들이 사기엔 좀 비싼 향신료다보니... 그래서 요거트는 과감하게 가격을 내리기로 했음ㅋㅋㅋ 일단 반응이 어떤지 알아보고 싶어서 시작한 거니까 말이야. 그런데 첫주에 그걸 사간 사람들이 그 다음주에 그걸 다시 사러 온거야. 옆에 다른 사람을 끼고 말이지. 그는 이걸 요리에 넣어 먹었더니 맛이 아주 좋았다면서, 자네도 한번 시도해 보라고 옆사람을 부추겼고, 옆에 서 있던 사람은 이게 진짜 그런 마법의 가루냐며 미심쩍은 얼굴로 사갔는데... 그 다음주에 그마저도 향신료를 사러 왔어!
슬슬 향신료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자 상회엔 이제 향신료가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 되었어ㅋㅋㅋ 그냥 상회 한켠에 작은 공간만 내 주었던 형님은 당황스러울 정도였지; 그는 요거트에게 "재고를 더 많이 가져다 놓지 않으면 안되겠다. 상회에 오는 사람들이 다 그 향신료를 찾는다" 하고 소식을 전했고, 요거트는 신이 나서 향신료를 만드는 시종들을 더 늘리고, 상단에도 거래양을 늘리라고 주문했지.
요구르카에서 소소한 생필품만 사다 쓰던 거래처 도시는 난리가 났어. 요거트가 운영하는 상단에서 그 열매를 많은 돈을 주고 다 가져갔으니까. 그러다보니 가로수에 열리는 열매만으로는 수요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이제는 그 나무를 본격적으로 재배하는 사람도 생겨났지. 다행히 그 열매는 정말 키우기 쉬운 작물이었던지라, 얼추 수요량을 맞출 수 있게 되었어. 별 볼일 없었던 작은 도시는 아주 오랜만에 활기를 띄게 되었지.
그러다보니 그쪽 도시에서는 요거트가 운영하는 상단에 큰 감사를 표했고, 특히 상단의 주인인 요거트크림 도련님을 꼭 뵙고 싶다고 했어ㅋㅋㅋㅋ 요거트는 마음 같아서는 그 도시에 직접 가보고 싶었지만, 요구르카에서 꽤 먼 곳이다 보니 쉽게 가기엔 좀 무리가 있어서... 나중에 장사가 더 잘 되면 가보겠다고 약속했지.
요거트는 처음으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어. 이게 23살의 요거트가 겪은 일이었지.
라일락은 요거트가 다시 전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온 데에 안도했어. 그때 그 밤... 요거트가 자기 앞에서 "이대로 죽고 싶다" 고 말했을 땐 정말 라일락의 세상마저 무너져 내리는 듯 했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죽지 말라고 외쳤던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 호소가 먹혔던 모양이야. 물론 아직도 가끔 요거트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어. 검은 옷을 입고 말이지. 그럴 때마다 라일락은 말없이 요거트 곁을 지켰어.
라일락은 그때 그 밤을 아직 잊지 않았어. 쇠약해진 요거트를 돌보고, 그를 품에 안았고, 아무도 모르게 입까지 맞춰버린 그 밤을.
단 한번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 행위가 가지는 죄책감의 무게가 너무 컸어. 라일락은 요거트가 상단 일로 기뻐하고 활짝 웃을 때마다 그 위에 시커먼 자신의 욕망을 덧칠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때마다 라일락은 눈을 감아버렸지. 그런데도 요거트가 가진 빛이 너무 강해서 자꾸만 감은 시야로도 파고들어와. 그러면 눈이 부셔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눈을 뜨고 마는 거야.
"라일락! 이것 봐. 이번달 매출이 이만큼이나 나왔어." 이번달 손익계산을 해보던 요거트가 매우 기쁜 얼굴로 라일락에게 전표를 보여주었어. 10살에 요거트가 가르쳐 준 숫자는 라일락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지. 만약 그때 숫자를 배우지 않았다면 요거트가 이렇게 말하고 뭔가를 보여주어도 하나도 못 알아들었을 거야. 라일락은 한눈에 봐도 굉장한 이익을 낸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어.
"네 덕분이야! 그때 네가 저 열매 씨앗을 말려서 갈아보자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야." 요거트가 라일락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활짝 웃었지. "내 상단의 1등 공신은 너야, 라일락! 네가 갖고 싶은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봐!"
내가 갖고 싶은 것. 라일락은 그 말에 숨이 막히는 듯 했어. 내가 갖고 싶은 것? 그건 너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네가 내 품에 안기고, 내 품에서 웃었으면 좋겠어. 너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하루를 보내고 싶어. 마치 네가 그 여자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처럼 말이야. 그리고 나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일락은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어.
"... 딱히 필요한 건 없어." 라일락은 짧게 대답했어. 요거트가 의외라는 듯, 아쉽다는 듯 라일락을 바라봤지. "진짜 없어?" "응." 요거트가 가볍게 팔짱을 꼈지. "아쉽네. 네가 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의향이 있는데 말이지! 뭐, 당장 생각나지 않는다면 나중에 얘기해도 좋아. 언제든지 얘기해!" 그렇게 말한 요거트는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각종 전표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지.
8
요거트의 상단은 이전보다 규모가 꽤 커졌어. 향신료는 이제 요구르카 내에서 어떤 요리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수품이 되었지. 그러다보니 수요와 공급이 일정하게 맞춰졌고, 초반처럼 극적인 매출 보다는 꾸준한 매출이 이어지게 됐지. 요거트가 사업에 꽤 소질이 있음을 알아본 다른 형제들이, 이번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보는게 어떻냐고 했어. 상단이 커지면 그만큼 수익이 더 나올테니까. 처음엔 이정도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요거트도 고민이 되었지. 또 괜찮은 게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되었고ㅋㅋㅋ
그러다보니 한동안 미뤄뒀던 사교계 모임도 다시 나가게 됐어. 지난번에 향신료 시연을 위해 잠깐 나갔던 거 이후로는 모임은 안 나갔거든. 향신료 사업 때문에 좀 바빠서 말이지... 이번에는 이전처럼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가는 자리가 아닌, 정보를 끌어모으기 위해 나가는 자리인 만큼 예전처럼 화려하게 치장하는 건 그만 두기로 했어. 물론 여전히 요거트는 꾸미는 걸 좋아하고, 좀 덜 치장했다고 해도 남들보다 워낙 돋보이는 존재이긴 했지만ㅋㅋㅋ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 사업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사교계에서도 꽤 핫한 주제였어. 처음엔 그들도 역시 요거트의 가족들처럼, 막내 도련님이 머리가 돌아버렸나보다 했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잖아? 그러니 요거트가 보기보다 사업에 자질이 있는 거 아니냐, 이러다 나중에 요구르카 경제계를 휘어잡는 큰손이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의견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지. 아, 요거트 가문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도 그들에겐 큰 문제이긴 했지. 요거트네 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슬슬 후계자를 정할 때가 되었다는 건 요구르카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다들 이 막내 도련님에 대해서는 그저 놀고 먹기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애교도 많지만 고집도 센 꼬맹이라고만 생각했지 이런 사업가 자질이 있다는 건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야. 그래서인지 요거트가 다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요거트 가문의 누구에게 붙어야 이익을 챙길 수 있을지 다시 저울질을 해야했지.
어쨌든 요거트도 이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으니까... 좀 더 정숙한 옷을 차려입었고, 단순한 사담이나 가십거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보다는 소위 말하는 '고급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더 어울리게 되었지. 그 와중에도 요거트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교제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껴 있었어ㅋㅋ 요거트는 그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어.
옆에 선 라일락이 보기에도 요거트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 마냥 철없는 도련님이었던 요거트가 조금은 성숙해진 느낌이랄까. 요거트가 또 이렇게 한걸음 먼저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라일락은 전에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 느꼈어. 요거트는 매번 이렇게 달라져만 가는데, 자기는 늘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느낌. 이쯤되면 자기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걸까? 그런 고민이 되었지만,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 좋은지, 아니, 변화를 시도하는 게 좋은 것인지조차도 감이 오지 않는걸...
요거트가 변해가는 모습에 초조함을 느끼는 건 라일락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요거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달라진 것은 라일락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어. 특히 요거트에게 교제를 요청했던 사람들 말이야. 이전에도 요거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가차없이 내쳐버렸지만 그래도 가뭄에 콩나듯이 누군가를 만나보기는 했었잖아?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말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으니, 그게 안달이 난 모양이었지... 마치 절벽에 핀 아름다운 꽃을 손에 넣고 싶지만, 도저히 닿지 않아 미칠 것 같은, 그러면서도 누가 먼저 채가지 않을까 전전긍긍 하는 그런 눈빛들. 어쩌면 자기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걸 요거트가 알아챘으면 어쩌지 싶은 마음에 라일락도 몇번이나 거울을 다시 본 적이 있었지.
그 중에 특히 집요한 남자가 있었어. 그는 이제 막 시작한 상회를 운영하는 남자였는데, 요거트가 가진 사업 아이템이 마음에 드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요거트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었지. 그는 요거트의 상단이 가지고 오는 향신료를 자기 상회에서 취급하고 싶어 했어. 요거트는 여전히 형님이 운영하는 상회에서만 향신료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자기 상회와 함께 일하면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끈덕지게 요거트를 설득했지. 요거트는 그쪽에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괜찮다며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그 남자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어. 급기야는 요거트에게 자기 마음까지 덜컥 고백하고 말았는데, 당연히 요거트는 거절했지.
처음엔 그 남자가 그저 근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라일락은, 남자가 고백을 했다고 요거트가 밝힌 이후부터는 고운 눈으로 봐줄 수가 없게 됐어. 싫다고 하는데 왜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 거지. 그래서 라일락은 남자의 말이 장황하게 길어질 즈음엔 뒤에서 일부러 헛기침을 했어. 그럼 요거트가 그 신호를 알아듣고, "음~ 좋은 제안이었어. 그것도 고려해 볼게. 그럼 난 이만, 내 호위 무사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하고 남자를 물러냈지. 그 남자는 자기의 대화를 방해한 라일락을 다소 살벌한 눈으로 노려봤지만 라일락은 그걸 무시했어.
비가 오는 날이면 요거트는 늘 검은 옷을 입고 창가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벌써 약혼녀가 죽은 지 2년이나 지났지만, 그녀가 두고 간 빈자리는 크기는 작아져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거든.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거기에 빗물이 가득 들어찬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사교계 모임에 참여해야했어. 요거트 대저택의 별채에서 열리는 모임이었고, 중요한 정보를 교류하는 자리가 있었으니까... 요거트는 아침부터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간단하게 치장을 마치고 저녁 연회에 참여했지. 물론 라일락도 함께 말이야.
전에없이 간소한 옷차림으로 나타난 요거트를 보고 다들 놀란 눈치였지. 화려하게 치장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시선들이 요거트를 바라봤어. 온통 검은색으로 수수하게 차려입고 목부터 발끝까지 꽉 싸맨 요거트는 다소 처연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그게 더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었지... 하지만 차분하게 눈을 내리 깐 요거트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어. 요거트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모두 무시하고 자기 할 일을 위해 연회장 옆에 마련된 작은 응접실로 들어갔지. 그리고 거기에 모인 이들과 소규모 모임을 가졌지.
중요한 모임이었기 때문에 라일락은 밖에서 대기했어. 어차피 그 안에 들어가도 라일락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테지만, 나름 보안이 철저한 모임이라 호위 무사인 라일락은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 라일락은 문 옆의 벽에 몸을 기대고 가볍게 팔짱을 꼈어. 밤인데도 창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지. 비가 오는 날에는 요거트의 기분은 물론이고 몸 상태도 급격히 나빠지는 걸 알고 있는 라일락은 모임이 빨리 끝나길 바랐어. 끝나자마자 바로 요거트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서 재우는 게 나을 날씨였지.
모임이 생각보다 길어졌어. 요거트는 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걸 느꼈지. 그래도 최대한 멀쩡한 척은 했음. 오늘 얻은 정보는 향후 요구르카에서 유행할 사업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정도는 요거트도 저택에서 오며가며 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크게 영양가는 없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모임에 나오지 않고 쉬었을 거야. 요거트는 부채로 입을 가린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
긴 모임이 끝나고 다들 정보 교류를 마친 뒤 하나 둘 응접실을 나갔어. 요거트도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려고 했지. 예의 그 남자가 붙잡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그는 모임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거트 앞을 가로 막았는데, 기분도 별로인데다 머리까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한 터라 요거트는 눈썹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봤어. 남자는 다시 또 요거트를 설득하려 애를 썼어... 웬만하면 적당히 흘려들을 것이었지만, 요거트는 기분이 워낙 다운된 상태이다보니 저절로 짜증이 치솟았지.
"제발 그만해." 요거트가 얼굴을 가렸던 부채를 신경질적으로 내리며 외쳤어. 남자가 움찔하며 한발 뒤로 물러섰지. "지금 나더러 그렇게 사업성 없는 일에 손을 대라고 하는 거야?" 목소리를 크게 내니까 머릿속이 더 징징 울리는 기분에, 요거트는 말을 고르지 않고 되는대로 내뱉어 버렸어. "그정도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 당신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걸 할 수 있잖아. 게다가 이전에도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이쯤되면 포기할만 하지 않아?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남자는 요거트가 한 말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눈치였는데... 힘줄이 드러나도록 주먹을 꽉 쥔 남자의 눈빛이 바뀌었어. 그는 요거트를 노려보며 아주 위협적으로 으르렁 댔지.
"그래, 재벌가에서 태어난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내가 얼마나 절박한지 말이야!" 그는 다짜고짜 요거트의 팔목을 낚아채려 했어. 요거트는 갑자기 그의 태도가 돌변해서 자신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어찌저찌 몸을 틀어 피하면서, "그만 둬!" 하고는 남자를 밀어버렸어. 요거트가 자신을 밀어버릴 줄 몰랐던 남자는 그대로 발이 꼬여 뒤로 넘어지면서 장식장에 등을 크게 부딪히고 말았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주저 앉았고, 요거트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남자를 쳐다봤는데.
"무슨..." 등을 부딪힌 남자의 상태가 이상했어. 부딪힌 건 분명 등인데, 그는 가슴을 잡고 괴로워하고 있었어... 요거트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인지가 되지 않아 바짝 굳은 채 남자를 쳐다만 보고 있었고...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은 채 괴로운 숨을 토해내더니, 갑자기 입으로 피를 왈칵 토해냈어. 시뻘건 피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와 앞섶을 붉게 물들이고.... 요거트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어.
그 순간 누군가가 와서 요거트를 감싸안으며 시커먼 것으로 시야를 가려버렸어. 그리고 두 팔로 단단히 그를 끌어 안았지. 훅 끼쳐오는 향기로 그게 누구인지 알아챈 요거트는, 공포에 물든 눈을 들어 라일락을 쳐다봤어...
"요거트크림, 일단 진정해." 라일락이 한 손으로 요거트의 시야를 가리며 속삭였지. 라일락은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응접실 밖으로 나오는데, 요거트는 나오지 않아서 걱정하는 중이었어. 혹시 아직 안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 아니면 몸 상태가 너무 나빠져서 안에 쓰러져 있는 건 아닐까? 라일락은 조심스레 응접실 문의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는데, 그 순간 요거트가 남자를 뒤로 밀쳤고, 남자가 장식장에 등을 부딪히는 걸 봤지. 또 저 남자로군. 라일락은 혀를 차고 이 틈에 얼른 요거트를 건져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남자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죽는 걸 보게 된거야.... 그 순간 라일락도 사고가 완전히 정지하는 걸 느꼈어. 머리가 그야말로 새하얗게 탈색되는 느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서 요거트를 감쌌어.
"라일락, 라일락..." 품에 안긴 요거트가 연신 라일락을 찾으며 그의 팔을 마치 생명줄마냥 꽉 붙잡았어. 다리가 후들거려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데, 라일락은 주저앉는 요거트를 따라 무릎을 꿇으며 망토로 그를 아예 덮어버렸어. 요거트는 완전히 패닉상태가 되어 숨을 내뱉지 못하고 계속 들이마시기만 했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지. 라일락은 우선 요거트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어서, 망토 안에서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어. "진정해, 괜찮아." "사람이, 죽었어... 내가, 아, 내가 사람을..." "사고였어. 일단 진정해. 숨 쉬어, 요거트크림." 라일락이 요거트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요거트는 도저히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계속 가쁜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는데, 이대로는 과호흡으로 쇼크가 올지도 몰라. 라일락은 급한대로 제 입술로 요거트의 입을 틀어막았어.
"흐읍.... 으..." 숨을 끊임없이 들이마시던 입이 막혀버리자 요거트가 괴로운 소리를 냈어. 라일락은 요거트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강하게 잡고, 요거트의 숨이 잦아들 때까지 눈을 질끈 감았지.
한참 뒤에야 요거트는 겨우 들이마시던 숨을 멈추었고, 라일락은 요거트를 놓아주었어. 하지만 숨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 패닉 상태인 건 변하지 않았어... 요거트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 덜덜 떨고 있었어... 라일락은 입술을 짓씹은 채 요거트의 어깨를 감싸안고, 눈으로는 죽어버린 남자를 훑어봤지. 등을 부딪혔는데 가슴을 부여잡은 고통의 흔적과 입에서 쏟아진 피... 뭔가 이상했어.
"도련... 꺄아악!!!!" 열려있던 문을 통해 들어왔던 시종이 장식장 앞에 쓰러진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질러댔어. 그 소리에 밖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응접실 안은 순식간에 충격의 장이 되고 말았지.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오늘 사교계 모임의 주최자였던 요거트의 형, 플레인 요거트가 사람들을 헤치고 나타났어. 그리고 모두가 바라보는 방향에 쓰러진 남자와, 그 앞에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된 동생, 그리고 그를 감싸고 있는 라일락을 발견했지. "이게 도대체 무슨..." 플레인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에 할 말을 잃고 말았어.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어.
그 말에 요거트가 몸을 크게 움찔했어. 라일락은 제 품에 안긴 요거트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는 걸 꾹 붙잡았지. 사방이 무거운 침묵에 둘러싸이고, 둘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사나웠어. 요거트는 그대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서 라일락을 붙잡았어. 저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가녀린 손길에, 라일락은 단 한 가지 생각만 했어. 요거트크림을 지켜야 한다고.
"... 제가 그랬습니다." 여전히 요거트를 끌어안은 채 라일락이 고개를 들어 대답했어. 순식간에 거기 모인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크게 탄식하고, 곧이어 비난하기 시작했지. "사람을 죽였어!" "어떻게 이런 잔혹한 짓을!" "호위 무사 주제에 귀족을 공격하다니!" "당장 감옥에 가두십시오!" ....
라일락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요거트는 숨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라일락을 올려다봤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너는 아무 잘못 없잖아. 내가 한 짓인데, 왜 네가 자진해서 그걸 뒤집어 쓰려고 해? 굳어버린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내리는데 요거트는 그걸 주체할 수가 없었어. "저자가 도련님을 공격하려해서, 제압하려다 실수했습니다." 비난하는 이들에게 라일락이 다시 거짓말을 했지.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만해. 하지 마! 요거트가 라일락을 붙잡고 흔들었어. 라일락은 곁눈질로 요거트를 슥 바라보고는,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지...
"... 연행해라." 플레인이 데리고 온 다른 호위 무사들에게 명령했지. 그들은 강제로 라일락과 요거트를 떼어놓았고, 라일락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은 채 그를 끌고 갔어. 사람들이 끌려가는 라일락의 뒤에 대고 큰 소리로 욕을 했어. "살인자!"
그 자리에 주저앉은 요거트에게 다른 시종이 다가와 그를 감싸안았어. "놀라셨지요, 도련님... 어찌 이런 끔찍한 일이..." 시종들은 요거트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요거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어.
어떻게...? 왜...? 요거트는 넋이 나간 채 멀어지는 라일락의 뒤를 눈으로 좇았어.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그와 동시에 요거트는 무너져내려 바닥에 엎드린 채 라일락을 부르짖었지.
9
다음날 요구르카 전역은 간밤에 사교계 모임에 있었던 일로 떠들썩 했지. 사교계 모임 중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더라. 그런데 그게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 데리고 다니는 호위 무사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더라.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대? 글쎄 그건 모르겠네. 알기로는 죽은 귀족이 막내 도련님한테 손을 대려고 해서... 거기에 호위 무사가 끼어드는 바람에... 그 귀족이랑 도련님이 원수 관계라며? 아냐, 그 호위 무사가 도련님을 사랑해서...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는 얘기라곤 온통 그것 뿐인데, 소문이 돌고 돌아 왜곡되었지. 어느 누구도 진실은 알지 못한채 가십거리를 떠들어 댔고.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요거트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사고를 친 건 자신인데, 라일락이 거짓말을 해서 자기 대신 감옥에 가버렸잖아! 자기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도 그렇지만, 라일락이 자기 대신 끌려간 게 훨씬 더 충격이었어... 그날 밤에 요거트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어찌저찌 방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여서 시종들도 매우 곤란해 했지.
자신을 돌보겠다는 모든 시종들을 내쫓아버린 요거트는 끊임없이 방을 빙빙 돌며 생각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왜 그 남자는 장식장에 등을 부딪혔는데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고, 라일락은 거짓말을 한 거지? 요거트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방을 돌며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 주저 앉아서 울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다시 생각하고... 밤새도록 반복했어. 그러다 결론을 내렸지. 어떻게든 라일락을 구해야 한다는 것.
라일락은 요거트의 개인 호위 무사라고는 하지만, 신분상으로는 노예임. 그러니 이 사건은 분명 노예가 귀족을 죽인 것으로 치환되어 재판이 열리게 될거야. 어떤 이유에서든 노예는 귀족을 다치게 하거나 죽여서는 안되는게 요구르카의 법이니, 라일락은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중형으로 결론이 나 있을거야... 중형이라 함은 최소 요구르카에서의 영구 추방일테고, 재판부에서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사형이겠지. 어떻게든 라일락을 변호해서 그를 구하던지, 적어도 사형만은 면해야만 해. 요거트는 입술을 굳게 다문채,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에서 나왔지.
아침부터 가족들은 심각한 얼굴로 모여 가족 회의를 하는 중이었어. 하필이면 요거트 대저택의 별채에서 열린 사교계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고, 하필이면 거기에 막내와 그의 호위 무사가 연루된 일이어서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지. 자칫 잘못하면 요거트 가문 전체에 큰 오명이 씌이게 될거야. 그래서 가족들은 아침 댓바람부터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 중이었고, 마침 요거트를 부르러 갈 참이었는데 요거트가 먼저 회의장에 나타났지.
"라일락은 잘못이 없어." 회의장에 도착하자마자 요거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어. 가족들은 저마다 심각한 얼굴, 탐탁지 않은 얼굴, 비통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어. "일단 앉거라. 그러다 쓰러지겠구나." 맏형이자 가족 회의를 연 플레인이 요거트에게 자리를 내어주었지. 하지만 요거트는 자리에 앉지 않았어. "그자를 죽인 사람은 나야. 라일락이 아니라, 나라고!" 요거트가 저 자신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지. 거기에 모인 모두가 놀란 얼굴로 요거트를 쳐다봤어.
"대체 무슨 소리냐, 막내야." 플레인이 요거트의 두 팔을 붙잡고 진정시키려는듯이 말했지. 요거트는 그 팔을 뿌리쳤어. "내가 그랬어! 그자가 나에게 달려들려고 해서, 그래서 밀쳤다고. 그런데 그자가 장식장에 등을 부딪히더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요거트크림." 요거트가 채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플레인이 말을 끊었어. "네가 저질렀든, 네 호위 무사가 저질렀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은 너와 우리 집안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일을 처리하는 것뿐이야." 플레인이 다시 요거트의 두 팔을 붙잡고 냉정하게 말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채 싸늘하게 굳어버린 요거트가 주변을 돌아봤지. "라일락은 나 대신 거짓말을 하고 누명을 쓴 거야. 라일락을 구하는 게 먼저 아니야?"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어. 다들 요거트의 시선을 피하거나, 혹은 플레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지. 가족들의 의도를 읽은 요거트는 머리가 핑 도는 듯 했어... "다들 플레인요거트 형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라일락은?" "그는 너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거지. 그게 원래 호위 무사의 역할이니까." 플레인이 못을 박듯 이야기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요거트가 다시 자기를 붙잡은 플레인의 팔을 밀어냈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라일락이, 라일락이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알잖아. 그런데 이렇게 그를 내버리라고? 그게 말이야? 아니, 사람으로서 할 짓이야?" 요거트가 있는대로 소리치며 호소했지만, 거기엔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어... 회의장의 공기만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을 뿐이야.
저를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침묵에 요거트는 헛웃음을 지었지. 아, 그렇구나. 이 사람들에게는 라일락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구나. 하긴, 전에도 그랬었지. 라일락이 나를 구하느라고 다쳤는데도 가차없이 매질을 하던 사람들이었지. 요거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어. 더는 이들과 할 이야기가 없었지. 요거트는 그대로 몸을 돌려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버렸어. 아무도 그를 말리러 나오지 않았지.
회의장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향해서 걷던 요거트는 가족들의 냉랭하고 인정머리 없는 태도에 진저리가 났지만, 지금은 거기에 화를 낼 때가 아니었어. 아무도 도와주지 않겠다면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으니까.
요거트는 복도 한 가운데에 멈춰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장 해야할 일부터 머릿속에 빠르게 정리했지. 라일락은 요거트 대저택의 호위 무사들이 연행해 갔지만, 재판을 위해 아마 요구르카 경비대로 넘겨졌을거야. 그럼 그들을 찾아가 재판 날짜가 언제인지 알아야 해. 거기까지 생각한 요거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서 자신의 방에 간 뒤, 아무 옷이나 대충 걸친 채 급하게 요구르카 경비대 본부로 향했어.
요구르카 경비대는 간밤의 일로 무척 분주해 보였는데, 요거트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알아보고 정중하게 대접해 주었지. 요거트는 시간이 없으니, 라일락이 여기에 있느냐, 그의 재판 날짜는 언제냐, 그를 보러 갈 수 있느냐 물었어. 경비대 담당이 라일락은 여기 지하 감옥에 수감된게 맞지만 중죄인이기 때문에 면회는 불가능하다고 했어. 그리고 재판은 앞으로 사흘 뒤에 열린다고 했지. 사안 조사를 좀 더 진행한 다음에 말이야.
사흘. 촉박한 시간이었어. 적어도 일주일은 시간이 있을줄 알았는데, 재판부에서 사안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게 틀림 없었지. 요거트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깨물고, 경비대 담당에게 다시 물었지. 그자의 시신을 부검하느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경비대 담당자는 고개를 가로저었어. 사인이 명확한데다 가족들이 부검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지. 말도 안되는 소리야. 그자는 등을 부딪혔지만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어떻게 사안 조사를 하며 부검을 안 할 수가 있지? 요거트는 경비대 담당에게 화를 낼뻔 했지만, 이자는 말단이라 어떤 권한도 없는 걸 알았기 때문에 꾹 눌러 참았어. 대신 경비대 대장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지.
경비대 대장은 다소 곤란한 눈치였어. 요거트가 라일락을 풀어주라고 할까봐 그런 거 같았지.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요거트였지만, 그래봐야 자신과 라일락의 입장만 곤란해져. 그래서 요거트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그자의 시신을 부검해." 요거트는 딱 그 말만 했지. 경비대 대장은 가족들이 이미 시신을 가져가서 장례를 진행 중일거라 불가능하다고 했어. 요거트는 쯧 소리가 나도록 혀를 차고, 그럼 자기가 그 시신을 되찾아 올테니 당장 부검을 하라고 말하고는 경비대 본부를 나왔어.
그자는 요구르카의 귀족 중에서도 그리 지위가 높지 않은 자였기 때문에 그가 지냈던 저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어. 하지만 요거트는 그자가 자기에게 지겹도록 말한 직접 운영하는 상회의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지. 당장 거기까지 찾아간 요거트는 작은 상회를 지키고 있는 침울한 얼굴의 상인들에게 물어 그가 살았던 저택을 찾아냈어.
작은 저택은 벌써 장례식 준비를 마쳐두었고,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지. 검은 옷을 입고 정원을 정리하며 길을 트고 있던 시종들은 갑자기 나타난 요거트를 보고 혼비백산하며 주인을 부르러 갔어. 곧장 저택의 주인- 아마도 남자의 부모와 누나인듯한 사람들이 나왔지. 그들은 모두 검은 상복을 입고 눈물을 훔치고 있다가,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나온 모양이었어.
소중한 사람이 죽은 충격은 요거트도 겪어본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마주한 순간 잠시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 했어... 이런 상황에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제대로 들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요거트는 라일락을 구해야만 했어. 그래서 요거트는 주먹을 꾹 쥔채, "아들의 시신을 부검하게 해 달라" 고 요청했지.
남자의 아버지는 파랗게 굳은 얼굴로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요거트를 쳐다보았고, 어머니와 누나는 곡소리를 내며 주저앉았어. "...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것으로도 모자라 가는 길까지 더럽히려 하십니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원망이 서려 있었어... 아버지가 원통한 눈으로 요거트를 책망했지.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요거트는 그 시선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고 숨이 떨렸어. 하지만, 라일락을 구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야. 요거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간청했지.
"그는 라일락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그의 죽음에 뭔가 문제가 있어." 요거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자기가 목격한 석연치 않은 점들을 이야기했지. 아버지는 비참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고, 어머니와 누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귀를 막아버렸지. "그만..., 그만 하십시오. 더는 도련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고통스럽게 외쳤어. 마치 피를 토해내듯 쥐어짜는 소리에 요거트도 가슴이 옥죄어오고 너무나도 괴로웠지만, 물러설 수 없었어.
"부탁이야... 부검을 허락해 준다면, 그가 죽은 이유를 밝히고 그를 죽게 만든 진범이 누군지, 내 명예를 걸고 반드시 밝혀내겠어..." 요거트는 허리를 숙였고, 무릎을 꿇었어. 그 모습에 아버지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어. 어머니와 누나도 너무 놀라 가슴을 부여잡은 채 요거트를 바라봤지.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 요구르카에서 가장 오만방자하다는 존재가 무릎을 꿇다니, 이런 건 단언컨대 단 한번도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는 광경일거야... 그들은 요거트의 행동이 당혹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요거트는 고개를 숙인채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어. 하물며 가족들 앞에서도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었는데, 생판 모르는 남에게, 그것도 오히려 저를 위협했던 남자의 가족들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다니... 요거트는 눈을 질끈 감았지. 치욕스러운 상황일법 하지만, 지금은 온통 라일락 생각뿐이었어... 라일락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것 정도는 수백, 수천번도 할 수 있으니까...
"... 알겠습니다." 한참 뒤에야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어. 요거트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지. 그는 떨리는 눈으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그 옆의 어머니와 누나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만 흘렸지... 요거트는 천천히, 비틀거리며 일어났지. 그리고 허리를 숙여 유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어...
라일락은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 감옥에 우두커니 앉아있었어. 어젯밤의 일이 아직도 현실같지 않았어. 요거트에게 밀쳐져 죽은 남자, 그 앞에 패닉에 빠진 요거트,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연행되는 과정에서 들었던,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요거트의 목소리... "라일락!!!" 마치 환상같은 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라일락은 눈을 떴지. 여기는 너무 어두워서, 요거트가 가진 찬란한 빛 조차도 들지 않는 곳인데. 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곳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 라일락은 어둠 속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어.
요거트를 감싸기 위해 자기가 그 남자를 죽였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중형을 면하기는 어려울 터였지. 라일락은 노예 신분인 자신이 귀족인 남자를 죽인 것으로, 적어도 요구르카에서 영구 추방 혹은 사형을 선고 받을 것을 예상했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지. 요구르카는 철저한 신분제인 도시니까.
라일락은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어. 거기서 자기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요거트가 불명예를 얻게 되었을 거야. 10살에 회초리를 맞으며 배운대로, 그는 요거트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시종이야. 16살에 몸소 익힌 대로, 그를 보호해야하는 의무가 있는 호위 무사고. 그리고 20살에 깨달은 대로, 요거트크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 자신을 내던져서라도 그를 지켜야만 해. 그러니 후회하지 않아. 그를 지킬 수 있다면 말이지. 하지만...
요거트는 괜찮을까? 그때 얼른 그를 감싸기는 했지만, 요거트는 그 남자가 죽는 과정을 고스란히 다 봤을텐데. 그래서 충격을 많이 받았을 거고, 그건 분명 또다른 트라우마가 되었을 거야. 다시 밤에 잠을 못 자고 식음을 전폐한 채 헛구역질을 해 댈지도 모르지. 가뜩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몸이 약해져서 걱정인데, 그 몸이 더 충격을 받아 크게 앓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라일락은 제가 어떻게 될지보다는 그게 더 걱정이었어...
아니, 차라리 요거트가 앓아 누워 자신의 재판장에 오지 않는게 나을지도 몰라. 경비대가 전한 말로는 재판이 사흘 뒤에 열릴 거라고 했고, 재판 전 이틀간 심문이 이루어질 거라고 했어. 아마 그건 심문을 빙자한 고문이겠지. 그리고 고문을 받고 나면 몰골이 피폐해질테고, 그런 상태로 재판에서 중형까지 받는 자신을 요거트가 지켜본다면, 그땐 요거트는...
요거트는 그녀가 죽었던 때처럼, "나도 죽고 싶어, 라일락." 이라는 말을 할까? 아니면..., 아니면 그저 저택의 수많은 시종 중 한 명이 죽는 거 뿐이라고 가슴 아파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까?
"나와라. 심문 시간이다." 간수가 열쇠를 짤랑이며 라일락을 불렀어. 라일락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고, 간수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걸어 심문실로 향했지.
요거트는 재판부를 직접 찾아가 자기가 라일락의 변호와 증인 역할을 하겠다고 신청했지만 재판부는 거절했어. 노예의 변호인으로 귀족을, 그것도 요구르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요거트를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지. "내가 그의 주인이야. 그리고 그는 내 재산이고." 요거트는 재판부 담당자를 씹어먹을듯 노려보며 말했어. "난 손해 보는게 싫어. 내 재산에서 단 하나라도 손해보는 건 없어야 해. 내 스스로 내 재산을 지키겠다는데, 그래도 방해할 건가?" 요거트의 살벌한 눈길에 담당자는 상부에 여쭙겠다며 한발 물러섰지. 요거트는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겠다고 확실히 못을 박아두고 재판부 건물을 나왔어.
말도 안되는 소리야. 요거트는 단 한번도 라일락을 제 소유의 물건이나 재산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 라일락은 그의 친구이면서 호위 무사인 든든한 존재인데... 하지만 남들 시선은 그렇지 않았던 거지. 방금도 봐, 라일락을 "물건" 취급하니까 바로 꼬리를 내렸는걸. 요거트는 가슴이 답답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라일락..."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요거트는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 이 모든 시도가 실패한다면 라일락은 어떤 형태로든 영영 그의 손을 떠나게 될거야.... 또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는 없어. 요거트는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쥐었어.
그래, 또 다시 같은 일을 겪을 수는 없어.
10
시간이 빠르게 흘러 라일락의 재판날이 되었어. 가족들은 혹시라도 요거트가 허튼짓을 할까봐 그를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다른 호위 무사들을 시켜 방 문 앞을 지키도록 시켰는데, 요거트는 대담하게도 그들 중 하나를 꼬드겨(나중에 일이 잘 처리되면 돈을 무지하게 많이 주겠다고 회유했다) 방에서 나오는데 성공했어. 요거트는 시종 하나만 데리고 빠르게 재판부 건물로 향했지. 재판장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가 요거트를 알아보고 얼른 문을 열어주었어.
재판장 안에는 이미 판사와 검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방청석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있었는데, 그 중에 죽은 자의 유족이 있었지. 그리고 요거트네 집안에서 나온 형과 누나들 몇몇 또한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은 확실히 방에 가둬두었다고 생각한 요거트가 이 자리에 나타나자 엄청나게 놀란 눈치였어. 요거트는 그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당당히 걸어 변호인석에 앉았지.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경비대 대원들이 라일락을 끌고 나왔어. 눈에 익은 보랏빛 머리가 보이는 순간 요거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차마 라일락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어... 라일락은 두 손은 굵은 쇠사슬로 결박된 채, 지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는데... 팔이며 등이 채찍으로 인한 상처와 불그스름한 자국으로 엉망 진창이야...
그걸 바라보는 요거트는 속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했고, 저도 모르게 손에 든 부채를 있는 힘껏 잡았지. 가뜩이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한테 고문까지 하다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당장이라도 라일락을 고문한 사람을 찾아내어 똑같이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섣부른 행동이 라일락에게 불리하게 작용될지 몰라 참아야만 했지...
곧 재판이 시작되었어. 검사가 그날 밤에 있었던 사건을 간결히 읊었지. 요거트 대저택의 별채에서 열린 사교계 모임날, 응접실에서 있었던 고급 정보 교류회 이후, 응접실 안에는 그 남자와 요거트 둘만 남았다. 남자가 먼저 요거트에게 손을 대려 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호위 무사인 라일락이 뛰어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남자를 밀쳐냈다. 밀쳐진 남자는 장식장에 등을 세게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요거트는 그 말을 들으며 틀린 부분을 짚었어. 라일락은 일의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어. 그는 요거트가 남자를 밀친 뒤에 응접실에 들어왔지. 그리고 남자는 등을 부딪힌 충격으로 죽은게 아니야. 죽기 직전에 매우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쥐어 뜯었으니까...
검사가 라일락에게 자기가 말한 내용이 맞는지 추궁했어. 라일락은 짧게 "예 맞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어. "거짓말이야!" 결국 견디지 못하고 요거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어. 바짝 날이 섰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라일락은 고개를 들었어.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던 요거트가, 어째서인지 변호인석에 있는데...
판사가 억울한 마음은 알지만 절차가 있으니 잠시 참아달라고 했어. 요거트는 이를 갈며 검사를 노려보고, 라일락을 돌아봤어. 왜 자꾸 거짓말을 하는거야? 요거트는 당장이라도 라일락에게 거짓말은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더욱 분했지...
이제 판사가 요거트에게 증인과 변호를 요청했어. 요거트는 자리에서 일어났지. 라일락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고, 방청석에 앉은 그 남자의 유족들과, 요거트의 형 누나들, 거기 앉은 모든 이가 불안하면서도 의심과 궁금증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어. 잠시 심호흡을 한 요거트는 입을 열었어. "그자를 죽인 건 나야. 라일락이 아니라."
재판장에 모인 모든 이가 크게 술렁이며 당혹감을 표했어. 순식간에 웅성이는 소리가 재판장 안을 가득 채웠지. 판사가 얼른 판사봉을 내리쳐 장안을 조용히 만들었어. 요거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천천히 입을 열었지. "하지만 내가 죽인 것도 아니야. 그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었어."
요거트는 그날 있었던 일을 다시 짚어 이야기 했지. 남자가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를 제지한 것은 라일락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다고. 달려드는 그를 막으려고 밀어내었는데, 그가 발이 꼬이며 뒤로 넘어지면서 장식장에 등을 크게 부딪혔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는 등이 아닌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했고,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말이지.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고, 라일락은 오히려 일이 다 끝난 뒤에야 자신에게 와서 자기를 보호했다고, 요거트는 라일락을 변호했어.
"죄인의 증언과 다릅니다, 판사님." 요거트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검사가 지적했지. "요거트크림은 죄인의 주인으로, 그를 변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요거트가 검사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지. "라일락은 내 시종이야. 나는 그의 주인이고. 만약 라일락이 정말 죄를 지었다면, 주인이고 귀족인 내가 내 명예를 훼손하면서까지 그를 변호할 이유가 있나?" 그 말에 판사도 약간 동의하는 듯 했어. "그가 진짜로 결백하니까 내가 이렇게 직접 나서는 거야. 나는 내 '재산'이 훼손되는 건 싫거든." 라일락이 작게 몸을 움찔하는 걸 보면서도 요거트는 굳이 '재산'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어. 그래야 검사도 판사도 그의 말을 인정해 줄테니...
"... 그렇다면, 정말 요거트크림 도련님이 범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검사가 그를 돌아보며 정중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지. 요거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어. 다시 재판장이 술렁이기 시작했지... "만약 도련님께서 범인이라면, 이 죄인은 풀려나겠지만 도련님은 법정 구속됩니다." 검사가 요거트를 쳐다보았고, 요거트는 검사를 쳐다봤다가 라일락에게 시선을 떨어뜨렸어... 라일락은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요거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재판장 문이 활짝 열리며 경비대원 하나가 급히 달려왔어. "신성한 재판 중에 실례합니다, 판사님! 사건에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어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경비대원에게 쏠렸지. 판사는 사건에 중요한 단서라는 이야기에 그를 재판석에 들어오게 했어.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내렸지. 요거트는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왔구나 싶어 보이지 않게 두 손을 굳게 모아 잡았어.
"죽은 이의 사인은 등에 받은 충격이 아닙니다." 경비대원이 결과를 먼저 밝히자 다시 재판장 안에 큰 탄식이 터져나왔어. "부검 결과, 죽은 이는 죽기 한 시간 전에 독약을 먹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독을 섭취하게 된 경위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용된 독약은 서서히 폐를 손상시킨듯 합니다. 죽은 이가 등을 부딪힌 시점에 이미 폐가 상당히 손상되어 복구 불가능한 상태였으며, 등에 받은 충격과는 상관 없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사인에 유가족이 울음을 터뜨리며 통곡했어. 그리고 요거트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어. 꽉 모아 잡은 손이 덜덜 떨렸지... 남자가 죽은 사인이 등에 받은 충격이 아닐 거라는 굳은 확신이 있긴 했지만,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확정지을 수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혹시라도 등에 가해진 충격이 결정적인 사인이 될까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정말 다행이었어...
재판장은 한동안 어수선했고, 판사가 다시 판사봉을 들어 모두를 조용히 시켰지. 이제 검사가 구형을 할 차례였는데... 검사는 일단 그자를 죽인게 라일락이 아니더라도, 노예가 귀족을 공격했으니 어쨌든 라일락을 추방해야 한다고 얘기했어. 판사는 요거트에게도 마지막 변론을 요구했지. 요거트는 라일락은 아무 잘못이 없고, 그가 한 잘못이라고는 그저 저를 감싸기 위해 한 거짓말뿐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했어... 판사는 검사와 요거트의 최후 발언을 듣고 깊게 고심했지...
긴 침묵이 지나가고, 드디어 판결이 내려질 차례였어. 여기에 모인 모두가 판사의 결정을 기다렸지. 특히 요거트는 이 순간이 마치 억겁과도 같다고 느꼈어... 너무나 무겁고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요거트는 다시 보이지 않게 두 손을 모아 잡았어... 이제 그가 라일락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으니, 남은 건 결과뿐이었지.
"사건의 정황을 미루어 보아 죄인은 피해자를 죽이지 않았음이 확실하고, 피해자의 사인 또한 죄인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죄인 라일락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고 판사봉을 세 번 내리쳤어. 사방에 환호와 탄식 같은 갖가지 소음이 가득 차올랐는데, 요거트에게 그런 소리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 오로지 무죄, 라일락이 무죄라는 그 선언만 의미가 있었을뿐...
재판은 끝이 났고, 판사는 요구르카 경비대에게 남자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재개하라고 명령했어. 경비대는 연행했던 라일락을 풀어주었어. 요거트는 모든 걸 다 제치고 일단 라일락에게 달려갔어. 라일락은 완전히 지친 얼굴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가, 요거트가 달려와 자신을 와락 끌어안자 고개를 슬쩍 들었어.
"라일락!!" 요거트가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가, 라일락이 조금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자 얼른 떨어졌어. "미, 미안해, 아프지,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자...!" 요거트가 허둥대며 주변을 둘러보다 데리고 온 시종과 함께 라일락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어. 라일락은 차라리 제 발로 걷고 싶었지만 채찍을 맞은 자리가 부어서 아프고 쓰린데다가, 너무 지쳐있었던 터라 걸음을 걷기가 어려웠어... 어쩔 수 없이 요거트와 시종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 요거트는 남을 이렇게 부축해 본 적이 없어 굉장히 불편한 자세로,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라일락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어.
저택으로 돌아오니 재판장에서 먼저 돌아온 형과 누나들이 소식을 알린 모양인지, 가족들이 염려 반, 탐탁지 않음 반이 뒤섞인 심란한 얼굴로 요거트와 라일락을 맞이했어. 그들 중 반은 요거트가 낑낑대며 라일락을 부축하고 있어도 그냥 쳐다만 보다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반은 조금 걱정이 된 모양인지 다른 시종을 불러주었지. 요거트는 정말 이 사람들은 라일락에게 일말의 관심 조차 없구나를 다시 마음에 새기며,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라일락을 방에 데려다 놓았어.
시종들이 빠른 손길로 라일락이 편히 있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요거트는 당장 의사를 불렀어. 사흘을 꼬박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채 지독한 심문을 견디고 차디찬 방에서 부실한 식사를 삼켜가며 버텨낸 라일락은 드디어 편한 자리에 누울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세 열이 올랐어... 의사는 상처 회복에 도움이 되는 연고와 해열제를 처방해 주었지. 요거트는 그걸 받았고, 자기가 직접 라일락을 간호하겠다고 했어.
시종들은 요거트를 말렸지. 요거트 역시 사흘 내내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리한 걸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요거트는 굳이 자기가 라일락을 간호하겠다고 우겨댔어. 요거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시종들은 한발 물러났지만, 언제든 도련님이 힘들고 지치면 말씀하시라고 세번이나 강조했지.
라일락은 꼬박 하루를 열로 앓았어... 꾸준히 무술 훈련으로 몸을 다져와서 보통 체력이 아니었을텐데도 높은 열로 앓는 걸 보니 보통 심한 고문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요거트는 라일락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닦으며 부드득 이를 갈았어. 아무리 라일락이 노예 신분이라고 해도, 엄연히 자기 호위 무사인데 이렇게까지 심한 대우를 한단 말이야! 요거트는 나중에 요구르카 경비대를 찾아가 이에 대해 따져야겠다고 생각했지.
다음날에야 라일락은 정신이 들었지만,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날 기력은 없어보였어. 요거트는 라일락이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도 기뻐서, 그의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았지. 라일락은 고개만 살짝 들어 침대 옆에 앉은 요거트를 바라보았어...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땐 창백하게 질려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혈색은 좋아졌지만 훨씬 피곤해 보이고 수척해 보였어. 입술도 말라서 갈라진 것 같고, 눈 밑에 살짝 어두침침한 부분이 생긴 것도 같고... 라일락은 요거트가 자기를 구하기 위해, 감옥에 갇혀있던 사흘간 밤낮없이 돌아다녔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지.
라일락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요거트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 어차피 기운이 없어 오래 앉아있지도 못할 거 같으니, 오늘 하루는 그냥 편하게 누워있으라고 말이야. 그래서 라일락은 자리에 누운 채 요거트를 바라만 봤지. 요거트는 굉장히 서툰 솜씨로 굳이 자기가 직접 간호를 했어ㅋㅋㅋ 라일락은 "힘들게 고생하지 말고 시종들에게 맡겨라" 라고 했지만, 요거트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지. "너야말로 잔소리 하지 말고 내가 하는 간호나 받아라" 하면서 말이지ㅋㅋㅋ;
원래 식사를 꼬박꼬박 챙기는데다 상당히 많은 양을 먹었던 라일락도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지니 쉽게 식사를 할 수 없었어. 그날 하루는 겨우 한끼를 먹을 정도였지... 요거트는 그가 식사하는 걸 도와주었는데, 라일락이 겨우 한 그릇을 먹고서는 음식을 물러내는 걸 보고 혀를 찼어. "대체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해댔으면 우리 집에서 가장 밥을 잘 먹는 애가 이 모양이 된 거야!" 그 말에 곁에 있던 시종은 웃음을 삼키느라 고생했고, 라일락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지...
요거트는 그날 밤까지도 라일락 옆에 붙어서 꾸준히 서툰 솜씨로 그를 간호했어ㅋㅋㅋ... 시종들이 이만 교대하자고 해도, 자기는 라일락이 잠들 때까지 옆에 붙어있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지. 라일락은... 그게 좋기는 했지만 걱정이 앞섰어. 이러다 후에 요거트가 더 크게 앓아 누우면 그건 또 그거대로 호위 무사의 직무 유기가 되는 거 아닌가 싶은... 하지만 그래도 내심 요거트가 자기를 챙겨주는게 또 좋기도 해서, 그냥 요거트가 좋을대로 행동하도록 가만 두기로 했지.
"그럼 도련님, 절대 무리하지 마시고 피곤하면 가서 주무셔야 해요." 마지막으로 요거트를 도와 라일락을 봐준 시종이 방을 나서며 신신 당부했지. 요거트는 괜찮다고 알아서 하겠다고 굿나잇 인사를 전했어.
방 안에 어둠이 내려 앉았고, 창문을 타고 달빛이 흘러들어왔지. 요거트는 다시 라일락 곁에 앉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어. 라일락도 요거트에게 이만 가서 자라는 얘기를 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요거트가 "너도 가서 자라고 할거지. 그럴거면 네가 먼저 자라고." 하면서 말을 가로막았어. 하여간 정말 제멋대로야. 라일락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지.
달빛을 따라 침묵이 흐르고, 둘은 말이 없었어. 라일락은 창문에 드는 달빛을 바라보다가 슬쩍 요거트를 돌아보았는데, 요거트는 라일락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 역시 많이 피곤한 걸까. 라일락은 자기가 잠들어야 가서 자겠다는 요거트의 말을 상기하며 어떻게든 자 보려고 눈을 감았는데... 아무래도 상처가 쓰리고 아파 몸을 뒤척일 수밖에 없었지. 라일락이 끙끙대는 소리를 내자 요거트가 고개를 들었어.
"많이 아파? 약 발라줄까?" 요거트가 침대 옆 탁상에 놓은 연고를 들어올렸지. 라일락은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면 잠들기가 쉽지 않으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지. 요거트는 라일락을 잘 부축해서 일어나 앉게 하고는, 시종들에게 배웠던 대로 우선 부드러운 마른 수건으로 상처 주변을 잘 닦아냈어. 굉장히 서툴지만 또 조심스러운 손길. 라일락이 가만히 요거트를 바라보니, 요거트는 진지한 얼굴로 차근차근 상처에서 나오는 진물을 닦아내고 있었지.
상처를 잘 닦은 뒤에 요거트가 차근차근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어. 어떤 상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어떤 상처는 꽤 깊게 패였기 때문에 요거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찌르르하게 아팠지. 라일락이 가볍게 몸을 움찔대자 요거트는 계속 아프냐며 걱정을 해 댔어. 라일락은 그때마다 괜찮다고 대답했지.
"... 그러고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아." 요거트가 등에 난 상처에 약을 바르며 말했지. 아, 그때. 라일락도 기억이 났어. 납치될 뻔한 요거트를 구했지만, 등에 단검이 꽂히면서 큰 부상을 입었고, 요거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집안 어른들에게 매질을 당했던 날 밤. 그때 요거트는 굉장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철부지였지만 그래도 라일락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던 모양인지, 굳이 밤에 찾아와서 라일락의 상처를 봐주고 얼기설기 붕대를 감아주고 갔었지. 어쩌면 그때랑 굉장히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아 라일락은 입 안으로 쓴맛을 다셨어.
"... 그때 상처, 여기 그대로 남았네..." 요거트가 라일락의 등 한쪽에 남은 흉터 위에 손을 얹었어. 그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졌지... "너한테 이런 깊은 흉터를 남기다니... 게다가 또 다치게 만들었잖아..." 요거트가 들릴들 말듯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어... "나는... 나쁜 녀석이야... 매번 너를 다치게만 만들고..." 요거트가 등 뒤에 있어 돌아볼 수 없었던 라일락은 요거트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어리는 걸 알았어...
"... 미안해, 라일락..." 요거트가 라일락의 등 위로 머리를 살짝 기대며 말했어. "정말 미안해... 나는... 매번 너한테 의지하면서, 이렇게, 맨날..." 목소리가 점점 끊어질듯 잠기더니, 기어이 조용해져버렸지. 요거트는 입술을 꾹 다문채 눈물을 흘렸어. 라일락은 몸을 돌려 요거트를 안아주고, 괜찮다고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
한참 동안 라일락의 등에 기댄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요거트가 고개를 들었어. "미, 미안. 아픈 사람한테 기대버렸네." 약간 코맹맹이 소리로 요거트가 훌쩍이고는, 다시 집중해서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어. 등에 난 상처를 다 봐주고 난 뒤에, 요거트는 라일락의 앞으로 와서 이번에는 팔이며 어깨, 가슴 위에 난 상처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다시 차근차근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지. 라일락은 고개를 높이 처들고 천장을 바라봤어. 요거트가 울면서 사과하는게 마음이 아팠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가슴팍에 닿는 손길이 간지럽고도 기분이 이상해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몰랐거든...
"됐다. 이제 조심해서 잘 누워봐..." 연고를 다 발라준 요거트가 조심스레 라일락의 허리를 받쳐주며 잘 눕혀주었어. "어때? 이젠 좀 괜찮아?" 마지막으로 라일락의 앞머리를 가지런히 쓸어주며 요거트가 물었지. 라일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 요거트가 그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지. "그럼 이제 자. 잘 자, 라일락." 요거트가 그의 손을 꼭 잡아주며 굿나잇 인사를 전했어. "너도 이만 자." 라일락이 요거트에게 말했지. "아니, 나는 너 자면 잘거라니까!" 요거트가 같은 말을 또 했고 말이야ㅋㅋㅋ
라일락은 눈은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어. 많은 생각이 들었거든... 자기는 정말 죽을 각오로 요거트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어. 거기에 자기 목숨은 별로 중요치 않았어. 어떻게든 요거트를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설령 요거트가 그를 버리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요거트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어. 어떻게든 구해낸거지... 재판장에 요거트가 방청석에 앉아있을 수는 있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변호인석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지. 그때 그는 깨달았어. 요거트크림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란 걸. 그리고 제 손 안에 든 것은 무엇이든 절대 놓지 않는 대단한 녀석이라는 걸 말야.
라일락은 다시 눈을 떴어. 슬쩍 옆을 돌아보니 요거트가 쓰러질듯 위태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어.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지. 라일락은 여전히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웠지. 그리고 팔을 뻗어 요거트를 끌어당겼고, 요거트는 마치 부드러운 솜인형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이렇게까지 해도 깨지 않는 요거트를 보며 라일락은 가볍게 혀를 찼어.
옆자리에 요거트를 잘 정돈해서 눕힌 라일락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쓸어넘겨 드러난 곳에 살짝 입술을 댔어. 그리고... 조금 아래로 내려와 오똑한 코끝에 다시 또 살짝 입술을 대었지. 그리고는 마르고 갈라진 요거트의 입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지.
라일락 옆에 누운 요거트가 가볍게 끙 소리를 냈어. 라일락은 조금 덜 불편한 팔을 들어 요거트를 토닥여 주었지. 요거트는 금세 편안한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제야 라일락도 눈을 감았어.
11
라일락의 재판 이후 요구르카 저잣거리엔 다시 큰 소문이 돌았지.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 자기 호위 무사를 구하려고 직접 법정에 서서 변호를 했다, 그리고 그 호위 무사는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고. 재판 과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혹시 요거트가 재판부에 돈을 써서 호위 무사를 구해낸 것이 아니냐 했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니다, 도련님이 직접 변호를 해서 호위 무사를 구했다고 사실을 짚어주었지. 덕분에 저잣거리에는 "요거트크림 도련님은 정의로운 사람" 이라는 소문이 돌았어. 요구르카의 어느 귀족도 자기 시종을 위해 직접 변호인으로 나서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요거트 스스로가 일을 해결했으니 가족들 입장에선 다행이긴 했지만, 역시 고작해야 호위 무사 하나를 구하기 위해 요거트가 직접 법정에 나서고 변호인 노릇을 했던 건 못마땅했던 모양이지. 게다가 재판 이후에 남자의 사인에 대해 조사가 재개되었는데, 그날 사교계 모임은 요거트 대저택의 별채에서 열렸던 것이었기에, 당장 모임의 주최자인 플레인부터 시작해서 연회를 준비했던 시종이나 사교계 모임에 관여했던 모두가 다시 조사를 받았어. 집안 전체에 대한 불명예였지.
남자의 죽음은 그날 저녁 연회나 혹은 정보 교류회에서 마신 술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정확히 누가 술에 독을 탔는지, 어떤 종류의 독을 사용했는지 밝혀낼 순 없었어. 시간이 오래 지나기도 했고... 요거트는 유가족들에게 자신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범인을 찾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경비대의 수사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딱히 밝혀진 것 없이 수사가 종결되고 말았어. 요거트는 다시 그 유가족들을 찾아가 유감을 전했어.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요거트에게 죽은 이의 명복만 빌어달라는 부탁을 남겼지.
사교계에서의 평판은 저잣거리와는 정 반대였어. 그들은 겉으로는 요거트 대저택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척 했지만, 뒤로는 사실 요거트가 술에 독을 타서 평소 끈덕지게 쫓아다니던 그 남자를 죽였고, 호위 무사인 라일락을 사랑해서 그를 지키기 위해 변호인으로 나섰을 거라고 수군댔지. 특히 둘의 관계를 매우 문란하게 보는 시선이 많아졌어. 요거트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 약혼녀가 죽은 뒤로 남색을 탐하게 되었다는 괴이한 소문이었지.
상황이 이렇게 되니 요거트는 사교계나 가족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어. 어차피 그들 모두 각자의 명예만 중시할 뿐이야. 어떻게든 그가 명예를 더럽히길 호시탐탐 노리는 눈빛들에 지쳐버린 요거트는 원래 하던 일을 계속 하기로 했어. 자기의 작은 상단을 운영하는 일 말이야. 그에 대한 평판이 어떻든 간에 어쨌든 향신료 장사는 여전히 잘 되고 있었거든.
하지만 상단 운영을 하나의 도시에만 의존하기엔 위험했지. 만약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재료 조달이 어려워지면 문제가 생기잖아? 그러니 요거트는 원재료를 요구르카 근처에서 재배할 수 있는 방법도 알아보고, 그 도시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도 재배가 가능한지도 알아봤지. 그러다 근처의 다른 작은 도시와 거래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그 도시의 특산품으로 가져다 판 것이 요구르카에서 소소하게 인기가 있었어.
여기서 아이디어를 착안한 요거트는 거래망을 넓히는 대신 한 도시에서 하나의 특산품만 가지고 거래하는 방식으로 상단의 영역을 넓혀가기로 했지. 조금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이었는데, 다행히 첫번째 도시에서의 성공이 상당히 좋은 이미지로 먹혀서, 어느 도시를 가든 요거트의 상단과 거래를 하길 원했어. 그리고 그 도시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요구르카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말이야!
그러다보니 언제까지고 형님이 운영하는 상회에서 물건을 내다 팔 수 없었던 요거트는 처음으로 저잣거리에 자기 상회를 내게 되었지. 막내가 사업을 확장하는 데에 형과 누나들은 탐탁잖아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요거트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했음ㅋㅋㅋ 하다가 실패하면 뭐, 사업 접으면 되지 싶은 마음으로 말이야. 그런데 라일락의 재판 이후로 저잣거리엔 요거트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게 형성이 되어서 말이지, 다들 요거트가 운영한다는 상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뭐야. 게다가 그 상회엔 늘 요구르카에선 보기 어려운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오니, 예상보다 장사가 꽤 잘 되었어.
그렇게 몇달이 지났어. 요거트는 이제 어엿한 요구르카의 사업가가 된거지. 물론 여전히 철이 없고,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고, 일이 잘 안 되면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말이지ㅋㅋㅋ 그래도 자기 손으로 키운 상단과 상회에 상당히 애정이 깊어서, 요거트는 거기서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 굉장히 후하게 보상을 베풀었어. 그래서인지 상단과 상회에서 일하는 상인들은 늘 의욕이 높았고, 저잣거리에서 일하는 누구든 요거트의 상단이나 상회에 소속되고 싶어했지.
요거트는 25살이 되었고, 라일락도 25살이 되었지.
요거트는 늘 라일락에게 잘 대해주었지만, 재판 이후에 좀 더 신경써서 잘 해주는 것 같았어. 가장 의외인 점은 상단 운영이나 상회 관련해서 요거트 스스로가 답을 내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면 꼭 라일락의 의견을 물었다는 점이지. 라일락은 제대로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배워본 적이 없어 그런 학문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저 물건을 사는 소비자 입장에서만 대답할 수 있었는데, 의외로 그것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거든. 요거트는 입버릇처럼 라일락이 자기 상단의 은인이라고 얘기하고 다녔고, 그러다보니 상단이나 상회 상인들도 자연스레 그렇게 여기는 듯 했어. 그래서 고작해야 노예 신분인 라일락에게도 상당히 정중하게 대우해 주었지.
라일락은 이런 변화가 어색했지만 싫지 않았어. 마치 요거트와 둘이 상단을 운영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10살 때 그와 같이 글자를 배우고 숫자를 익혔던 때처럼 말이야. 그때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한편으로 라일락은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았지. 노예이고, 시종이고, 호위 무사인 자신의 위치를 말이야.
생각보다 요거트가 하는 사업이 승승장구 하다보니 가족들 중에 은근슬쩍 요거트를 견제하는 이들이 있었어. 그들은 요거트에게서 사업 비밀을 캐거나 무언가 약점이라도 잡으려고 웃는 낯으로 다가와서 친한 척을 하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요거트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맞이했지만 그들을 깊이 신뢰하지는 않았어. 라일락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라일락이 요거트 뒤에 서서 다소 험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면, 대부분은 눈치를 보고 안부나 전하러 왔다고 슬그머니 도망쳤지... 돌아가고 나서는 어떤 욕을 했을지 모르지만.
요거트의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나이를 먹어, 이제는 홀로 상단을 운영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쇠했어. 이제는 자질이 있는 자녀들을 추려서 사업을 나누어 주고, 은퇴하기를 원했지. 그런데 자녀가 워낙 많아야지. 그리고 그 중에 누가 사업에 재능이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자녀들을 시험해 볼겸, 20살이 되면 생일 선물로 작은 상단을 떼어주고 했었던 거야.
뭐, 자녀마다 성향이 다 다르다보니 상단을 받자마자 이정도 크기로는 자기 야망을 실현할 수 없다며 크기만 불리다가 망해버린 아들도 있었고, 자기는 상단 운영에는 관심이 없다며 받자마자 바로 반납해 버린 딸도 있었고...
막내인 요거트가 상단을 받았을 땐 아버지도 크게 기대는 안 했어. 막내 아들이 20살까지 하는 짓을 보아하니 얘는 진짜 돈을 쓰는데에만 관심이 있고 버는 데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런데 의외로 상단을 반납하거나 내팽개치지 않고 그럭저럭 관리를 하길래, 용돈 벌이라도 하라고 내버려 둔 것이었는데... 몇 년만에 상단을 키우고 스스로 상회를 세웠네? 게다가 저잣거리에서 평판도 나쁘지 않아.
그래서 아버지는 요거트크림을 후계자 반열에 올려놓았지. 마지막 후보로 말이야.
처음 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후계자 반열에 올라와 있던 형제들은 크게 반대했어. 후계자 후보가 너무 많잖아! 게다가 요거트는 나이가 너무 어렸거든... 고작해야 25살일뿐이야. 가장 큰 형인 플레인이 벌써 40대에 가까워진 것에 비하면 요거트는 나이가 너무 어린데다가, 그만큼 경험도 부족할 것이 틀림 없거든. 그런데 아버지는 뜻이 완고했어. 요거트가 자질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지...
어이가 없는 건 요거트도 마찬가지였어ㅋㅋㅋ... 자기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거 뿐인데, 갑자기 후계자 경쟁을 하라니 무슨 청천벽력이람! 가뜩이나 가족들이 자기를 고운 눈으로 안 보고 있는데다가, 요거트 본인은 가족 내 알력 싸움이나 정치 대결이라는 귀찮은 일에는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어. 피곤하잖아! 게다가 후계자 후보가 된 이상 아버지가 참여하는 행사엔 무조건 참여해야 했다고. 그건 사교계 모임과는 차원이 다른 무거운 자리여서 요거트는 그런 행사가 있는 날이면 아침, 아니 전날 저녁부터 벌써 짜증이 난 상태였음ㅋㅋㅋ 그걸 달래서 어찌어찌 데려가는게 라일락의 역할이었고ㅋㅋㅋㅋ 이럴 때 보면 정말 어렸을 때 그 철부지가 맞긴 맞구나 싶은 라일락...
"라일락, 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오늘도 아버지를 따라 행사에 참여했다가 녹초가 되어서 돌아온 요거트가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투덜거렸지. 라일락은 할 말이 없어 어깨만 으쓱거리고는 드러누운 요거트의 발을 주물러 주었지. 오래 서 있어서 발이 아프다나 뭐라나... 라일락이 해 주는 마사지를 받으며 요거트는 끊임없이 투덜거렸지. 가족들이 다 제멋대로 구는건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이야. 그건 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라일락은 막연히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ㅋㅋㅋ
그날도 아버지에게 중요한 손님들이 온 날이었고, 그래서 후계자 후보인 아들딸들이 모두 나와 그 손님을 맞이했지. 평소와 비슷한 날이었어. 점심 오찬이 끝나고 다과 시간이 되어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기 전까지는.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는 바람에 집안은 난리가 났어. 주치의는 물론이고 요구르카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의사들이 와서 아버지를 진찰했고, 모든 가족들이 초조하게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걱정했지. 의사들은 아버지가 나이가 너무 많고 노쇠하여 지병이 도져서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어. 지금이라도 당장 후계자를 정하고 자리를 물려주고선 은퇴해서 요양하는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지.
순식간에 집안 분위기가 험악해졌어. 쓰러지며 정신을 잃은 아버지는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한 상황. 그러니 후계자를 지명할 수 없었지. 아버지의 유언장에는 분명 후계자가 명시되어 있을거야.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유언장을 공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이러다보니 아버지가 얼른 정신을 차리셔야 할텐데, 어머니들과 시종들이 돌아가며 간호를 해도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고 말이야. 후계자 후보인 형제들은 물론이고 관련 없는 다른 형제들까지도 이 상황에 날을 세우고 있었지. 요거트는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 했고.
그러던 어느날, 큰형인 플레인이 형제들을 모두 소집했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말이야. 그리고 회의실에 모인 형제들에게 그는 "나가의 심장" 관한 이야기를 했어. 저 사막 건너의 화려한 황금 신전에 모든 병이든 낫게 한다는 신비의 영약인 나가의 심장이 있다고 말이야. 그건 아버지가 평생을 들여 얻고 싶었던 보물이었으며, 그게 있으면 아버지가 깨어나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지. 그러면서 그는 형제들을 돌아보았어. 누군가 그걸 찾으러 가길 바라는 눈치였지...
하지만 형제들은 당연히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어. 일단 요거트 사막이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고, 황금 신전이라는게 사막 건너 어드매에 있다는데 거기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고, 사막을 횡단하는 상인들에게서도 그런 신전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그저 황당한 전설일수도 있잖아?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위험한 여정이 될 수도 있으니 아무도 나서지 않은 것이었지... 여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건 요거트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아버지가 깨어나지 않는 건 무척 걱정이 되었지만...
"역시 얼토당토 않은 전설일 뿐이겠지? 하지만 아버지의 평생 소원이셨는데, 안타깝기만 하구나." 플레인이 턱을 쓸며 탄식하듯 내뱉었지. 그러면서 그는 요거트를 슥 훑어봤어. 플레인과 눈이 마주친 요거트는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지. 큰형이 왜 날 쳐다보는 거지? 그 시선을 따라 다른 형제들도 요거트를 돌아봤어. 그 시선이 점차 따갑게 느껴진 요거트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
"뭐야, 그러니까 아무도 그걸 찾으러 가지 않겠다는 거야? 그래서... 나더러 찾아오라고?" 아무도 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공간 전체를 감싸는 침묵이 무시무시했지. 요거트는 뒤로 한 발 물러섰어. "왜, 왜? 다들 나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잖아." "하지만... 아니다. 네가 가지 않겠다면 별 수 없지." 플레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어. 이제 주변에서는 대놓고 어떻게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이런 일을 안 할수가 있느냐는 시선을 던졌어. 저를 둘러싼 기류가 심상찮음을 느낀 요거트는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짐을 느꼈고...
"아, 알았어. 내가 가면 되잖아!" 결국 그렇게 외치고 말았지. 그러자 플레인이 단번에 안심이 된다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어. "역시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네 호위 무사도 직접 구해내는 정도의 정의로움이라면, 너는 분명 나가의 심장을 얻을 수 있을 게야. 그리고 아버지가 깨어나면 너를 무척 자랑스러워 하실게다."
방으로 돌아온 요거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온 건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어. 나가의 심장이라고? 그게 어디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찾아오느냔 말이야! 하지만 그런 분위기, 온 가족이 저만 바라보며 이 일을 해야 하는 건 너야, 네가 아니면 아버지가 돌아가실거야, 너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요거트는 머리를 쥐어 뜯었고, 가족 회의에 다녀온 요거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걸 발견한 라일락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
요거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라일락은 직감적으로 이건 함정이라고 느꼈지. "가지 않는게 좋겠어. 그... 나가의 심장인지 뭔지에 관해 아는 정보가 전혀 없잖아." 라일락이 진지하게 조언했지. 요거트도 거기에 동의했지만, 둘이서 뭔가 해결책을 찾기도 전에 갑자기 요거트의 방에 시종들이 들이닥쳤어. 요거트를 돌보는 이들이 아닌, 다른 형제들이 보낸 시종이었지. 그들은 벌써 요거트크림 도련님의 원정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며, 당장 떠날 채비를 돕겠다고 하는거야. 요거트가 말릴 새도 없었지!
거의 쫓기듯이 나가의 심장을 찾으러 떠나게 된 요거트는 가족들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억지로 요거트 대저택을 나섰음... 하지만 형제들이 지원해 준 원정대에 누가 섞여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데다가, 이 중에도 나가의 심장이 있다는 신전에 대해 아는 이가 없는 거야... 결국 요거트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인 라일락에게 의지한 채, 우선 요구르카 시내에서 정보를 끌어모으자 싶었지.
하루를 꼬박 소비해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요거트 사막 너머의 황금 신전에 대해 물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알지 못했어... 심지어 사막을 건너왔다는 여행자들에게 물어도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거야. 시작부터 이런 모양인데 대체 어떻게 나가의 심장을 찾아 오라는 거야! 요거트는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다리가 아파, 좀 지저분한 술집의 의자에 털썩 소리나게 주저앉고 말았지.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이봐, 형씨. 요거트 사막 건너의 황금 신전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다면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요거트에게 말을 거는 거야. 황금 신전이라는 말에 요거트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라일락은 남자가 요거트에게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요거트와 남자 사이를 가로막았어. 요거트는 라일락의 망토 뒤에서 고개만 내밀고 남자에게 물었지. "맞아. 당신 혹시, 그곳에 대해 알아?"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나는 아니지만, 거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알고 있지!" 하는거야. 그러면서 손짓으로는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 같은데... 라일락은 남자의 말을 섣불리 믿지 말라고 요거트에게 경고했지만, 지금 심정으론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했기에 요거트는 남자에게 큰 돈을 쥐어주었어. 남자는 아주 흡족한 얼굴로 요거트에게 받은 돈을 세려보고는, 어둠 속에 손짓해서 누군가를 불러내었지.
어둠 속에서 등장한 자는 풍성한 붉은 머리를 하나로 엮어 묶은, 눈웃음이 수상한 자였어. 자기를 전갈이라고 소개한 자는 "도련님이 나가의 심장을 찾으러 황금 신전에 간다는 분인가요? 저는 그곳에 대해 잘 안답니다." 하고 긴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웃었지. 활짝 웃고 있는데 그 눈웃음이 어쩐지 매우 수상해 요거트는 라일락 뒤에 숨어 망토를 꾹 잡았고, 라일락은 여차하면 품 속에서 무기를 꺼내들 준비를 했지. 그러나 전갈은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세요~" 하고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곳으로 가자고 하는 거야.
전갈은 그들을 보통 상단들은 다니지 않는 길로 안내했어. 거친 사막을 그대로 통과하는 길이었지. 사막 한 가운데를 이렇게 통과하는 건 노련한 탐험가들도 잘 시도하지 않는 루트여서 굉장히 힘들었지... 한낮에는 미친듯한 더위가 닥치고, 한밤중에는 이가 덜덜 떨리도록 추운 나날을 견뎌가며 겨우 오아시스가 있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을 때, 요거트는 거의 울뻔했어ㅋㅋ... 너무 고생을 많이 한 탓이었지... 그런데 우연찮게 거기서 요거트는 자기 상단 상인들을 만났어. 그러니까, 그 작은 도시는 요거트가 형성한 거래망에 속한 소도시였던 거지.
그 도시 사람들은 자기네 도시와 거래를 하는 상단의 젊은 주인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당장 요거트를 정중하게 대접해 주었어. 뜻밖의 장소에서 예상치도 못한 융숭한 대접에 요거트는 크게 감동을 받았어ㅋㅋㅋ 고된 여행 중에 조금은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게 되자, 요거트는 자기랑 같이 죽어라고 고생하고 있는 원정대원들(물론 형제들이 억지로 꾸려준 원정대라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에게 후한 대접을 해 주었지. 그들은 크게 기대하지 않다가 요거트가 그들을 위해 작은 연회를 베풀자 다소 의외라는 눈치였고.
그뒤로도 여정이 길었어. 라일락은 요거트의 체력이 한참 부족한 걸 알고 혹시라도 요거트가 사막 한 가운데에서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요거트는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다는 집념으로 버티는 중이어서 쉽게 쓰러지지 않았어ㅋㅋㅋ; 모래 폭풍이 불어 지저분한 모래를 잔뜩 뒤집어 쓰고, 관리를 받지 못해 머릿결도 푸석해지고 피부도 햇빛에 많이 타버렸지만 그래도 오기가 생겨 기어이 나가의 심장을 구해 요구르카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지. 억울해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그들은 기어이 황금 신전을 찾아냈어! 전갈이 그들을 속이진 않았던 모양이야. 한달이나 걸린데다가 오는 길이 험난해서 굉장히 힘든 여정이었는데 말이지... 물론 거대한 황금 신전이 온전한 형태이진 않았어. 사막 너머의 외진 곳에 있으니 사람 손이 안 닿을 법도 하지... 그런데, 전갈은 대체 이런 곳에 신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어쨌든 요거트는 신전을 찾았으니 이제 나가의 심장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급한 마음에 신전에 발을 디뎠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드는 화살에 맞을 뻔 했지. 다행히 라일락이 재빠르게 요거트를 밀쳐내며 보호해서 목숨만은 구했지만. 전갈은 오래되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귀한 보물을 지키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곳곳에 함정이 있을 거라고 했어. 요거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조심스레 한발씩 내디뎠지...
신전의 중앙부까지 가는데엔 정말 갖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어; 발을 디디기만 해도 바닥이 뚫려서 끝도 보이지 않는 구멍에 떨어지는 것도 있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이상한 액체가 쏟아지기도 하고,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오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원정대 중에 몇몇은 함정에 당해서 낙오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서 요거트는 제 몸을 감싸며 덜덜 떨었지. 라일락은 요거트의 어깨를 굳게 감싸 안았고 말이야.
그리고... 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한 요거트는 거대한 제단과 그 뒤의 커다란 뱀 모양의 석상 한 가운데 박힌 보석을 발견했지. 기이한 푸른 비취색이 나는 보석... 그게 "나가의 심장"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거였어. 생각보다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보석이었기에 요거트를 비롯해 거기 도착한 모두가 잠시 넋을 놓고 나가의 심장을 바라보았지. 요거트는 아주 조심스럽게 석상에 다가가 나가의 심장에 손을 댔어. 혹시라도 여기에 함정이 있으면 어쩌나 싶어 눈을 질끈 감은채... 손 끝에 이상하게 뜨끈한 느낌이 났고, 가볍게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의 심장이 석상에서 빠져나왔어! "다행이다!" 요거트는 감탄했고, 곁에서 그를 지탱하고 있던 라일락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흠~ 그걸 얻는데 성공하셨군요, 도련님." 제단 아래에 요거트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전갈이 소매를 가리며 웃었어. "'누군가'는 그걸 얻는데 실패했거든요. 아무래도 의지가 남다른 사람을 보석이 직접 선택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보죠?" 그렇게 말한 전갈은 갑자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요거트를 향해 던졌어! 다행히 라일락은 전갈이 소매 안에서 무언가 쥐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어. 얼른 요거트를 제 품에 끌어당겨 전갈의 공격을 피한 라일락은, 석상에 박히는 금빛 독침을 발견하고 품에서 재빠르게 차크람을 꺼내 들었지.
"뭐, 뭐야! 왜 나를 공격하는 건데!?" 석상에 박혀버린 독침을 발견하고 너무나 놀란 요거트가 나가의 심장을 손에 꼭 쥔 채 소리쳤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나도 그걸 노리고 있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렇게 말한 전갈은 빠르게 제단을 타고 올라와 요거트를 노렸고, 라일락이 그녀와 대치했지. 그와 동시에 다른 원정대원들도 각자 품에서 무기를 꺼내들었어. 그리고 요거트와 라일락을 향해 달려들었지.
역시 함정이었구나! 라일락은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요거트를 향해 벗어던지고 달려드는 이들과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지... 요거트는 라일락이 던진 망토를 받아들고 일단 뒤집어 썼어. 누가 그걸 잡아채며 요거트를 끌고가려 했는데, 우연찮게도 라일락이 던진 차크람과 전갈이 던진 독침을 동시에 맞고 쓰러져 버렸어. 눈 앞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기겁한 요거트는 망토를 있는대로 붙잡은 채 뱀 석상에 바짝 등을 대고 붙었지;
10년 넘게 무술을 단련한 성과는 아주 화려했지. 이미 사범님을 뛰어넘을 만한 실력자였던 라일락은 무리 없이 원정대원들을 제압했고, 벌써 남은 건 전갈뿐이었어. 전갈은 날렵하고 유연한 몸짓으로 뒤로 빠져나가 잠시 숨을 골랐지. "나도 뒷골목에선 한 솜씨 하는데, 넌 정말 대단하구나. 라일락이라고 했나? 보통 실력자가 아닌데." 전갈이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어. 마치 이정도 실력자와 싸우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듯이 말이지.
둘은 거의 호각으로 겨루었어. 어설픈 실력의 깡패나 납치범이나, 호위 무사의 방어 위주 무술과는 달리 사람을 확실하게 죽일 의도를 가진 전갈의 무술은 대처하기 까다로운 편이었지. 무엇보다 맹독이 발라진 독침을 피해가면서 동시에 때때로 요거트에게 날아드는 독침마저 튕겨내야 했기에 굉장히 난이도가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라일락은 내심 희열을 느꼈어. 그 역시 이정도 실력자와 겨루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기 때문이지.
결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어. 전갈은 이제 독침이 떨어졌고, 라일락도 차크람이 상해 더는 사용할 수 없었지. 둘은 이제 맨손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사범님과 맨손으로 대련하는 일이 많았던 라일락이 훨씬 유리했지. 라일락은 강한 힘으로 주먹을 내질러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고, 전갈은 짧은 비명과 함께 멀리까지 튕겨나가 제 배를 감쌌지.
"진짜 쉽지 않구나, 너." 전갈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잠시 기침을 해댔지. "이대로 물러난다면 목숨은 살려주지." 라일락이 짧게 말하자 전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가 섞인 침을 뱉었어. "뭐, 나도 더는 미련은 없어. 네 손에 죽고 싶진 않거든. 아, 그래도 덕분에 재미는 있었네~" 그렇게 말한 전갈은 찢어진 옷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웃더니, 라일락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어. 라일락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고,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깨진 작은 유리병에선 독이 퍼져 나왔지.
"돌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거야. 근처에 항구가 있거든!" 그 말만 남긴 전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전갈이 사라지자마자 라일락은 요거트에게 다가갔지. "라일락!!" 정말 망토에 파묻혀 있다시피 하고 있던 요거트가 라일락이 다가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 품 안에는 나가의 심장을 꼭 쥔 채로 말이야. 요거트가 어디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한 라일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안 다쳤어??" 요거트도 라일락을 여기저기 살피며 물었지. 라일락은 뭐, 갑작스런 전투로 인해 몸이 좀 뻐근하긴 해도 다친 곳 없이 멀쩡했어.
요거트는 제가 두르고 있던 라일락의 망토를 내밀었고, 라일락은 다시 망토를 입고 주변에 떨어진 자기 차크람을 주워들었어. 전투로 인해 날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쓰러진 원정대원들은 굳이 구하지 않기로 했어. 예상했던 대로 뒤가 구린 이들이었으니 말이지.
둘은 왔던 길을 되짚어 조심조심 신전을 빠져나왔지. 라일락은 전갈이 도망치며 한 말을 기억해 냈어. 근처에 항구가 있다는 말... 알고보니 신전 뒤에 바위 산이 있었는데, 그 산 너머에 항구 도시가 있었어... 그리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거기엔 우연찮게도 요구르카로 향하는 배편이 있는 거야!
바다를 가로질러 요구르카로 갈 수 있다는 말에 요거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어... "배편이 있었다니! 우린 대체 왜 사막을 가로질러 온 거야!?" 라일락은 아마 요구르카 저잣거리에서 전갈을 만난 그 시점부터 이미 지독한 함정에 걸려든 것이라고 예상했지... 일부러 이런 험난한 루트를 선택해서 그 과정 중에 요거트가 죽기를 바랐을지도 몰라.
둘은 바로 요구르카로 떠나는 배편을 얻어 돌아가기로 했어. 다행히 바로 한 시간 뒤에 떠나는 배가 있어, 간단히 요기만 한 둘은 배에 올랐지. 요구르카까지는 이틀이면 도착할거라는 선장의 말에 요거트는 이마를 짚었어. 정말 지독한 함정에 걸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허비했구나! 하는 허무함이... 그래도 어쨌든 나가의 심장을 무사히 구했으니, 이제 이걸로 아버지를 깨우기만 하면 뭐든 해결되겠지. 그러면 요거트는 후계자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자기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겠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요구르카에 도착하자마자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암살자들에게 쫓기게 될 줄이야. 요거트가 배에서 내리자 마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요거트를 노리고 달려들었어. 정확히는 요거트가 지닌 나가의 심장을 노리고 말이지. 물론 라일락이 훌륭하게 대처했지만, 요거트는 도대체 이 함정의 끝이 어디인지 치를 떨었지. 라일락은 최대한 신속하게 요거트 대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했어. 그래서 항구에서 마차를 잡으려고 했지만, 하필 운도 없게 항구에 대기 중인 마차는 한 대도 없었어. 할 수 없이 도보로 돌아가야 했는데, 하필이면 또 도로 공사라며 빠른 길목을 죄다 막아놓은 탓에 골목골목을 빙 돌아가며 가야했지...
"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방해하는 건데!" 라일락이 벌써 세 번째로 달려드는 수상한 인물들을 쓰러뜨리는 걸 지켜보며 요거트가 소리쳤어. 뭐, 보나마나 형제들 중에 후계자 후보들이 은밀히 보낸 이들이겠지. 요거트가 가지고 오는 나가의 심장을 가로채서 공을 빼앗아 가려는. 요거트는 이를 악물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저택으로 입성해서 자기 공로를 인정받겠다고 말이야.
다섯 번이나 되는 위협을 무찌르고(물론 라일락이) 겨우 저택 앞에 도착한 요거트는 지친 숨을 내쉬었어.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왔잖아? 이제 아버지께 나가의 심장을 건네기만 하면 되는데... 요거트가 저택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시종들이 너무나 놀라하며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호들갑을 떨었어. 지저분한데다 엉망진창이 된 옷을 추스를 새도 없이 요거트는 시종들에게 떠밀려 저택 본관의 아버지 방까지 가게 되었지.
그런데... 분위기가 영 이상해. 긴 복도를 지나는데 다들 마치 못 볼걸 봤다는 듯이 요거트를 바라보고 시선을 돌리는 가 하면, 저마다 입을 가리거나 뒤돈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보통이면 도련님 어서오세요 하고 환영했을 이들인데.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며 요거트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아버지의 방이 가까워질 수록 불길한 예감은 점점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지.
아버지의 방에 당도하자마자 마주한 건 큰형인 플레인요거트였어. 그는 아버지의 침대 앞에 서 있었지. 그리고 다른 형과 누나들도 모두 그 방에 모여있었어. 아버지의 침대 앞에, 양 옆으로 갈라져서 나란히 서 있던 그들은 엉망진창인 요거트 꼴을 보고 고개를 돌리거나 혀를 찼지.
"늦었구나." 플레인이 방 앞에 선 요거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지. 그 한 마디에 요거트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어. 늦었다니?
잠시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아 휘청이는 요거트를 라일락이 붙잡아 지탱해 주었는데, 요거트는 그 손길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갔어. 플레인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요거트를 바라보다 옆으로 비켜섰지. 그 뒤로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아버지는 얼굴에 하얀 천을 덮은 채였어. 그러니까, 돌아가신 거지.
12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눈 앞과 자기 주변을 둘러싼 모든 공간이 너무 이질적이라 머릿속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느낌. 요거트는 멍하니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어. 그렇게 고생했는데, 늦었단 말인가? 슬픔보다 허무함이 앞서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지.
"네가 더 빨리 도착했다면 아버지는 돌아가지 않으셨을지도 모른다." 플레인이 아버지 앞에 주저앉은 요거트에게 말했지.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나가의 심장을 애타게 찾으시다 돌아가셨다. 그 영약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기적처럼 살아나셨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한 플레인은 요거트를 내버려 둔 채 방에서 나갔고, 시종들을 불러 장례식 준비를 명령했지. 방에 모여있던 형제들도 저마다 무언가 이야기하며 방을 나갔는데, 그 중에 우는 사람은 없었어.
충격을 받은 건 라일락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주변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 라일락도 요거트를 챙겨서 자리를 비켜주어야만 했지. 라일락이 요거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그의 팔을 잡았는데, 팔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어. 완전히 기력이 빠져버린 인형같은 요거트에게 라일락은 "가자." 라고 말하고는 그를 데리고 방에서 나왔지.
요거트는 얼이 빠져선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어. 손에는 여전히 나가의 심장을 쥔 채였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고생했는가? 아버지가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아버지 곁에서 마지막을 지켜보는게 나았을지도 몰라. 그런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아버지는 돌아가신데다가, 가족들 모두 지킨 임종을 홀로 지키지 못했지. 대체 이게 다 무어란 말이야? 요거트는 제 손에 쥔 나가의 심장을 내팽개칠듯 질끈 쥐고는 높이 들어올렸어. 하지만 라일락이 그 손을 붙잡았지.
"... 놔, 라일락." 요거트가 라일락이 붙잡은 손을 떨쳐내려 팔에 힘을 주었어. 라일락은 고개를 가로저었지. "놓으라고. 이까짓 거, 이제는 의미 없잖아." 그래도 라일락은 요거트의 손을 놓지 않았어. "너마저 나를 거스르는 거야? 이것마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해?" 요거트가 팔을 크게 부르르 떨며 큰소리로 외쳤지만, 라일락은 기어이 그 팔을 내려 요거트의 품에 나가의 심장을 숨겼어. 주변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나다니기 시작했으니까... 라일락은 그를 감싸 방으로 데려갔지.
방에 우두커니 앉은 요거트는 상실과 슬픔을 앞서는 허무함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 시종들은 한달 만에 험난한 여행을 거쳐 겨우 집에 돌아온 요거트를 걱정하며 그를 씻기고 먹이려고 했지. 요거트는 그냥 멍한 채로 그들이 이끄는대로 움직일 뿐이었지. 손 안으로 쥔 나가의 심장을 의미 없이 어루만지면서 말이야...
아버지의 장례 준비가 끝났어. 요구르카에서 가장 큰 장례식이었지. 요거트가 참여한 세 번째 장례식. 첫 번째는 약혼녀의, 두 번째는 그 남자의,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의. 제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일이 많을 줄이야 요거트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렇기에 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어. 특히 아버지의 죽음은 더더욱.
장례식은 사흘간 이어졌어. 마지막 날, 장의사는 가족 모두를 불러 아버지의 시신 앞에 마지막 인사를 전하라고 했지. 그때 요거트는 아버지 앞에 나가의 심장을 바칠까 해서 품에 그것을 가지고 왔어.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탄식하며 아버지의 시신 앞에 명복을 비는 말을 했지. 드디어 요거트 차례가 되었고, 요거트는 창백하게 눈을 감은 아버지께 나가의 심장을 바치려고 그랬는데.
문득 가지런히 모인 주름진 손에 난 자그마한 피멍 자국을 발견했지. 저런 자리에 어떻게 멍이 생겼지? 아버지는 한달 전에 쓰러지셨고, 요거트가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으니 계속 침대에 누워계셨을 거야. 그러면 손도 따로 사용할 일이 없으셨겠지. 그런데 손에 멍이 생겼다고? 어떻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 요거트는 그 피멍 자국에 시선을 고정해 두고 있다가, 장의사가 "도련님." 하고 속삭였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어. 부랴부랴 아버지께 죄송하고, 좋은 곳에 가시길 바란다고 기도해 드리고 자리를 비켰을 때에야 요거트는 아버지께 나가의 심장을 바치지 못했다는 걸 알았지.
아버지의 장례는 모두 끝났어. 그리고 가족들은 다시 모였지. 아버지의 유언장을 공개할 차례였으니까. 아버지의 전속 변호사가 아버지 방 한켠에 있던 묵직한 금고를 열었어. 거기에 유언장이 있었지. 변호사가 유언장의 봉인을 풀었지.
"요거트 가문의 후계자는..." 아버지가 마지막에 지목한 요거트까지 포함하면 후계자 후보는 7명이나 되었어. 형제자매가 많았으니... 7명은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지. 요거트는 그렇게 앉아있으면서도 내심 자기 이름은 절대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야만 했지. 변호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어. 후계자 후보들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모두가 숨을 죽였지.
"... 없습니다." 변호사가 말했지. 뭐? 후계자가 없다고? 그 말에 놀란 누군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후계자 후보 중 하나인 다른 형이었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후계자가 없다니!" 그는 당장이라도 변호사에게서 유언장을 빼앗을듯이 손을 뻗었는데, 그 전에 변호사가 먼저 유언장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어. 거기엔 정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지.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고 말았어. 아버지는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고 세상을 떠나신거야!
충격은 곧이어 혼란이 되었어. 후계자 후보들은 패닉에 빠졌고, 다른 가족들은 물론 시종들마저 수군대다 못해 소란스러워졌어. 후계자가 없으면 상단 운영 총괄을 누가 해야하지? 게다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장 큰 상단은 어쩌고? 이대로 요거트 가문은 스러지게 되는 건가? 모두가 걱정으로 목소리를 높여가던 그때, 플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조용히 시켰지...
"이렇게 된 이상,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 큰형의 말에 모두가 수긍했어. 누군가는 가족 회의를 해서 투표를 한 다음에 후계자를 정하자고 했고, 누군가는 이제까지의 실적을 토대로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을, 누구는 7명이 똑같이 지분을 나누어야 한다고, 누군가는 아예 스무 명이나 되는 형제 자매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했지. 하지만 어느것도 당장 후계자를 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어... 그래서 그들은 우선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간 뒤에, 내일 아침에 다시 회의를 하러 모이기로 했지...
아버지가 후계자를 정해두지 않았다니. 이것마저 충격인 요거트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왔어. 역시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일락이 기운 없이 돌아온 요거트를 맞이했지. 마치 억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던 그날처럼 비척비척 들어온 요거트를 보고, 라일락은 설마 다른 후계자가 요거트를 쫓아내려고 하나 걱정했어. 그러나 요거트가 꺼낸 말은 그보다 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지.
"아버지가 후계자를 정해두지 않았어." 침대에 걸터앉은 요거트가 라일락을 올려다보며 말했어. "뭐?" 라일락은 눈썹을 찌푸렸지. "후계자가 없다고. 아무리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제멋대로셨다지만,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어." 요거트가 두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지... 라일락도 덩달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어. 후계자 후보 7명, 아니 이제는 스무 명의 형제 자매가 죄다 경쟁자인 상황이 된거야. 서로가 서로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칼을 들이대는 일도 서슴없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인 거지. 이러면 요거트의 신변에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어. 라일락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걱정이었지.
"... 내일 회의에서 무엇이든 정해질 거야. 나는 어쩌면 좋지? 라일락..." 요거트는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였어. 라일락은 머릿속으로 앞으로 요거트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다가, 요거트의 말을 듣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지. "우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거야 당연하잖아. 나는 후계자 자리에 관심 없어. 그냥... 지금 하던대로 계속 내 상단이나 운영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 "그럼 내일 가족 회의에 나가서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해." "... 하지만 다들 순순히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해 줄까?" 요거트가 다소 걱정스러운 눈으로 라일락을 올려다 보았지. 요거트가 운영하는 상단은 이제 규모가 꽤 커져 있었고, 특히 작은 도시를 묶어 만든 거래망은 굉장히 효용성이 높은 것이라 분명히 누군가가 탐내고 있을 것이었거든.
"... 방법은 없어. 너 스스로 돌파하는 수밖에는." 라일락이 요거트를 마주보며 대답했지. 요거트는 그 말에 잠시 눈을 내리 깔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
라일락은 마음이 다급해졌어. 가족 회의는 내일이지만, 아마 오늘부터 손을 쓰는 자들이 분명 있을테지. 특히 후계자 후보 7명 중 가장 세력이 약하고 어린 요거트를 노릴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라일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반드시 요거트 곁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지. 요거트에게는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말이야. 라일락의 의견에 동의한 요거트는 그날 하루를 바짝 신경쓰며 지냈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를 돌봐온 충성스러운 시종들을 제외하고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저택 내 시종이며 호위 무사 중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다행히 그날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특별한 일은 없었어. 방으로 가져오는 저녁 식사까지도 혹시 독이 들어있을지 몰라 라일락이 시음하기 전까지는 수저도 들지 않았던 요거트는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자 조금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라일락은 오히려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지. 오늘밤이 확실한 고비일거야. 라일락은 우선 요거트 방의 창문과 문을 단단히 단속해 놓았고, 그러고도 모자라 아예 방에 상주하겠다고 했지. 라일락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니 요거트도 덩달아 걱정이 되어 몸을 바짝 움츠렸지.
지나치게 고요한 밤이었어. 마치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고요함처럼. 긴장한 탓에 잠이 오지 않았던 요거트는 손 안에 나가의 심장을 쥐고 말이 없었지. 이 보물을 볼 때마다 허무함과 화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지만 어째서인지 손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거든... 왠지 모르게 소중히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 가만히 보물을 어루만지던 요거트는 문득 무언가 떠올라 방 문 근처에서 계속 경계 중인 라일락에게 말을 걸었어.
"근데 라일락, 아버지 손에 멍이 있었어." 팔짱을 낀 채 방 문 옆 벽에 기대고 있던 라일락이 고개를 들어 요거트를 쳐다보았지. "무슨 뜻이야?" 라일락이 묻자 요거트가 대답했지. "아버지 장례식 때 말이야. 마지막에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올리려고 했는데, 아버지 손에 조그만 멍 자국이 있었어. 아버지는 계속 침대에 누워 계셨을텐데, 어쩌다 그런 멍이 생기셨을까? 그걸 보느라고 나도 모르게 아버지께 이걸 바치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지 뭐야..." 요거트는 손 안에 든 나가의 심장을 들고 허한 미소를 지었지만, 라일락은 거기서 뭔가 짚이는 게 있었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손에 멍이 들기란 쉽지 않지. 그것도 정신을 잃고 있어 움직이지도 못했을 환자가? 게다가 요거트가 본 것은 피멍자국이라고 했으니, 그건 단순한 멍자국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 라일락이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어. "그건 보통 상처가 아닌 거 같아. 왠지... 독을 사용한 건 아닐까 싶은데." 그 말에 요거트는 숨을 삼켰어. "누군가 아버지를 독살했을 거라는 말이야?" "정황상 그게 가장 유력해. 손에 멍이 들기란 쉽지 않아. 웬만큼 강하게 부딪히지 않는 이상... 게다가 시신에 그런 이상 반응이 눈에 보일 정도로 확실하게 남았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강력한 증거지." 라일락의 말에 요거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이걸 아무도 몰랐다니, 말도 안돼!" 당장이라도 방에서 나갈 기세인 요거트를 라일락이 얼른 붙잡아서 말렸어. "왜 말리는 거야, 라일락? 네 말대로 너무 수상하잖아! 다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을텐데!" "알아도 몰라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 거야." 라일락은 요거트의 팔을 힘주어 잡았지. "아마 큰 주인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당시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낌새를 알아챘겠지만, 다들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큰 주인님께서 독살 당하신 게 맞다면 부검을 해야 하잖아. 누가 아버지의 시신을 부검하자고 먼저 말을 꺼낼 수 있었겠어?" 그 말에 요거트는 이전에 죽은 남자의 장례식에서 가족들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부검을 요청했던 일을 떠올렸지.
"그리고... 지금은 이미 장례가 끝났으니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요거트크림." 라일락은 차분한 눈으로 침착하게 요거트를 바라보며 말했지... 하필이면 아버지의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어. 이제와서는 시신의 부검도 할 수 없으니, 독살일지도 모른다는 정황만 있지 증거가 전혀 없는 상황... 요거트는 주먹을 꾹 쥐었어. 다시 자리에 앉은 요거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타는 것만 같았지. 그래서 시종을 시켜 물을 가져오도록 했고.
시종이 주방에서 물병을 가지고 왔어. 요거트는 생각 없이 물을 따라서 마시려고 했는데, 라일락이 혹시 모르니 먼저 마시겠다고 했지. 요거트는 라일락에게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어. 라일락은 혀끝을 살짝 내밀어 물 한 방울을 취했는데, 그 순간 혀끝이 짜릿했어. 당장 잔을 내친 라일락은 시종에게서 물병을 빼앗아 뒤집어 쏟아버렸어. 요거트도 시종도 라일락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물병 안에서 수상한 약초가 든 포가 나오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지. 라일락은 시종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어. "무슨 짓이지?"
얼결에 라일락에게 멱살을 잡힌 시종은 어쩔줄 몰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어. 자기는 그저 주방에 가서 물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거기 있던 다른 시종이 이 물병을 내밀어서 그걸 받아왔다고 말이야. 요거트 곁에서 꽤 오랫동안 일했던 시종이었기에 요거트는 라일락을 말렸어. 라일락은 혀를 차고 시종을 내려놓았고, 멱살에서 풀려난 시종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선 요거트에게 잘못했다고,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어댔지... 라일락은 우선 그 시종을 결박해서 방 한쪽에 두었어. 구석에 앉아 처량하게 우는 시종을 보고 요거트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라일락이 아니었다면 물을 마시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했지.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게 좋겠어." 라일락이 물병에서 나온 포를 들어 내용물을 살폈지. 강한 독을 지닌 약초는 아니지만, 일부 감각을 마비시키고 심한 복통을 일으킬 수 있는 약초였어.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심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만한 것이기도 했고. "... 너는 괜찮아?" 요거트가 묻자 라일락은 혀 끝이 아직 짜릿한 거 같지만 괜찮다고 했어. 욕실에 가서 입을 헹구고 온 라일락은 엉망이 된 바닥을 대충 정리하고, 심란한 얼굴의 요거트에게 다가갔지.
"벌써부터 이 지경이라니, 내일 회의가 얼마나 끔찍할지 기대가 된다." 요거트가 한숨쉬듯 중얼거리고는 이마를 짚었어. 한동안 말이 없던 요거트는 라일락에게 손짓해서 자기 옆에 앉으라고 했어. 라일락은 잠시 머뭇대다 요거트 곁에 앉았지. 그랬더니 요거트가 대뜸 라일락의 어깨에 몸을 기댔어. 잠시 놀란 라일락은 움찔하고 물러서려 했는데, 요거트가 먼저 손을 뻗어 라일락의 손을 꼭 잡았지.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너는 끝까지 나를 지켜줄 거지?" 거친 손끝을 어루만지며 요거트가 작게 속삭였지. 라일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
그날 밤을 꼬박 샌 요거트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회의장으로 향했어. 혹시 몰라 라일락도 그를 따라가서 회의장 밖에서 대기하기로 했지. 회의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모인 가족들은 그리 많지 않았어. 자리에 앉은 요거트는 이상하게 별로 모이지 않은 사람들을 둘러보았지. 채 10명도 되지 않는 듯 했어. 후계자 후보가 아닌 형제들은 이 자리에 안 올 수는 있어도, 후계자 후보인 형제들은 모두 와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7명 중에 3명이 자리에 없었어...
"아침부터 무척 어수선하구나.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의 시작을 알리며 플레인이 주변을 돌아봤지. 다들 그 시선을 피하며 누군가는 헛기침을 했지. 요거트도 큰형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어. 그러던 중에 회의장 문이 열리며 누나 중 하나가 아주 초췌한 얼굴로 나타나 자리에 앉았는데, 그녀는 간밤에 누군가가 주방에 있는 물병에 죄다 독을 타 놓았다며, 그 물을 마신 형제들은 모두 앓아 누워서 난리가 났다고 했지... 그 말에 요거트는 정말 라일락이 아니었으면 자기도 저 꼴이 났겠구나 싶어 보이지 않게 가슴을 쓸어내렸어; 어쨌든 그녀는 지금 자리에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 회의는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플레인은 급한 사안이니만큼 오늘 반드시 정해야 하는 일이고,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발언권이 없을 거라고 말했지. 그녀는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며 큰 소리로 따졌지만, 곧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구토를 하기 시작했어... 플레인은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시종들을 시켜 그녀를 회의장 밖으로 내보냈지...
요거트는 그 모든 과정을 숨을 삼킨 채 지켜봤어. 어젯밤에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살벌한 분위기에 목이 바짝바짝 말라갔지만, 바로 앞에 놓인 물잔에 도저히 손이 가질 않았어. 혹시라도 여기에 어젯밤의 독과 같은 것이 들어있을지 모르는 일이잖아? 그러는 사이에 아주 불편한 가족 회의가 시작되었지.
누군가가 먼저 일어나 의견을 제시했어. 형제들뿐만 아니라 사촌들까지 모두 끌어모아 전체 가족들의 다수결 투표로 후계자를 정하자는 의견이었지. 그랬더니 누군가가 반박했어. 그쪽은 자녀도 많고 어머니쪽 친척들이 많지 않느냐, 그러니 모든 가족을 동원하는 건 불합리하다, 형제들끼리 해야 한다고 말이지. 하지만 형제들끼리 다수결 투표를 해 봐야 의미가 없잖아? 다들 자기 자신에게 한 표를 행사할텐데 말이야. 그래서 그 의견은 기각되었어.
공정하게 상단에 기여한 공로를 따져서 후계자를 정하자는 의견도 있었지. 그런데 상단에 기여한 공로라는 것이 문제였지. 돈을 많이 벌어온 것? 상단의 크기를 불린 것? 아니면 다루고 있는 물품이 귀중품인 것?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공로를 따질 것인가가 문제가 된거야. 다들 저마다 유리한 것을 주장해대니 의견이 도저히 정리가 되질 않았어. 결국 이 문제는 일단 미뤄두기로 하고...
모든 형제가 동일하게 상단 지분을 나눠 가지자는 의견도 있었고. 하지만 이건 의견을 내자마자 바로 기각당하고 말았어. 왜냐면 정말 상단 운영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고, 작은 상단 운영마저 말아먹고 실패한 자도 있었기 때문이지... 뒤이어 후계자 7명이 우선은 상단 지분을 동일하게 나눠가진 뒤에, 이후에 더 좋은 성과를 낸 사람에게 정식 후계자 자리를 내어주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지. 하지만 그것도 반대에 부딪혔어. 그때 쯤 가서 누가 순순히 한 사람에게 지분을 몰아줄 것이냐 하는 것이었지...
"네 의견은 어떻느냐? 요거트크림." 말싸움을 시작한 형제들을 중재시킨 뒤에 플레인이 요거트에게 물었어. 요거트는 벌써 한 시간 넘게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는 회의에 지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젯밤에 생각한 그 의혹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거든... 이 이야기를 해야할까? 라일락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하잖아. 아버지는 독살당하신 거야. 그런데 그 범인을 찾지도 않고 후계자를 정한다고? 그러다 정말 아버지를 독살한 누군가가 후계자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
"요거트크림?" 플레인이 다시 그를 불렀어. 요거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입을 열었어. "아버지는... 독살당하신 거 같아." 요거트는 그 말을 제 입밖으로 내고도 저 자신에게 놀랐고, 당연히 주변은 크게 술렁였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회의 내용과 관련이 없잖아." 플레인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는데, 다른 형제가 플레인을 가로막았어. "아버지가 독살당하셨다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너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잖아!"
"하지만..." 요거트는 아버지 장례식에서 자기가 보았던 걸 말했지. 주름진 손에 선명하게 있었던 피멍 자국을... 그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가 "그러고보니, 요거트크림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까지 아버지는 상태가 꽤 괜찮으셨잖아. 비록 누워계셔서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헛소리를 하시긴 했어도 갑자기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었어." "그럼 아버지를 돌보던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독을 주입했다는 말이야?" "어떻게 그런게 가능하지?" "조사를 해 봐야 하는 사안 아니야? 아버지가 독살 당하신 거라면 보통 일이 아니잖아!"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플레인이 테이블을 한번 크게 내리쳤어. 모두가 플레인을 돌아보았지.
"이제와서 그런 의혹을 제기해 봐야 의미 없는 것 아니냐?" 플레인이 다소 화가 난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았고, 특히 요거트를 노려봤지. "그런 의혹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 제기되었어야 해. 그런데, 이미 장례식도 모두 끝났고,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까지 해버린 마당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대체 저의가 무엇이냐, 요거트크림." 적확한 지적에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지. "게다가 넌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지. 그래, 혹시 누군가 정말 아버지를 노리고 독을 주입했다고 치자. 하지만 네가 그 전에 '나가의 심장'을 가져왔다면 아버지는 돌아가지 않으셨을 거다. 그건 신의 정수고, 모든 병을 치료하는 영약이니 말이지." 플레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듯 해서 요거트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어. 그 말에 동의한 이들의 시선도 덩달아 날카로워졌지.
"다시 회의로 돌아가도록 하자. 우리는 앞을 봐야지, 이미 지나간 일을 탓하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 아니다." 플레인이 못을 박듯 말하고는 요거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회의를 이어갔지. 요거트는 역시 괜한 말을 한 것일까 후회하고 말았고.
회의는 결론이 나지 않고 점심 시간을 훌쩍 넘어서 이어졌어. 다들 열을 많이 올린 탓에 배도 고프고 지쳐서, 회의는 결국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았지... 각자 의견을 다시 정리해서 저녁에 다시 모이자는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 요거트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지. 나가면서 다들 요거트를 훑어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수군거렸는데, 요거트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그걸 신경쓸 새가 없었어.
요거트가 비틀거리며 회의장에서 나오자 밖에서 아주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던 라일락이 얼른 그를 부축했지. 우선 식사부터 하는게 좋겠다고 했는데, 요거트는 라일락을 말렸어. 회의장에 많은 형제들이 오지 못했는데, 그들은 어젯밤에 독이 든 물을 마시고 크게 탈이 나서 그런 거였다고 말이야. 그러니 오늘 저택에 나오는 식사도 믿지 못할 것이었어... 결국 둘은 저택에서 나와 아예 밖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지.
최대한 남들 눈을 피해 식당에 자리를 잡은 요거트는 전에 없이 많은 식사를 했지. 어제부터 꼬박 굶은 데다가 회의를 하며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었음ㅋㅋ... 그래봐야 라일락보다 적게 먹긴 했지만, 그래도 요거트가 이렇게 식사를 하는 건 처음 보는 라일락은 다소 당황한 채로 요거트를 지켜봤어. "이제 좀 살 것 같다." 음료를 쭉 들이킨 뒤에 요거트가 한숨을 내쉬었지. 그리고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라일락에게 이야기했지.
"...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확실하지 않다고." 요거트가 아버지의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는 시점에서 라일락은 심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어. 가뜩이나 요거트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여러모로 불리한 입장인데 거기에 새로운 의혹까지 제기하다니, 거의 제발로 사자굴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지. "역시 그런가..." 요거트가 시무룩하니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어. "하지만... 다들 그랬어. 내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위독하지 않으셨다고. 그리고 봐, 우리가 요구르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누군가가 우리를 계속 습격해 댔잖아. 분명 내가 아버지께 빨리 도착하는 걸 방해하려고 그런 거라고." 확실히 그날은 좀 이상하긴 했지. 라일락은 턱을 짚었어. 석연찮은 점이 너무 많았지. 하지만 이런걸 입밖에 내면 무조건 불리해지는 상황.
"... 어쨌든 후계자가 확실히 정해지기 전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 누구에게든 네가 생각한 것을 함부로 말하지 마." 라일락이 다시 짚어주며 경고했지. 요거트는 라일락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어.
후계자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관한 회의는 저녁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에 이어 저녁까지도 꼬박 회의가 이어졌지. 그나마 다들 요거트 상단에 기여한 공로를 따져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이를 후계자로 추대하자는데에 동의하긴 했는데, 문제는 어떤 공을 어떻게 점수를 매길 것인가가 문제였지... 단순히 돈을 벌어온 것, 상단을 확장한 것만 따지면 단연 큰형인 플레인이 가장 유리했거든. 그는 20살 이후로 계속 자기 상단을 운영하는 중이었고, 아버지가 노쇠한 뒤에는 아버지의 상단까지 대리로 운영했으니까 말이지. 그런데 거기에 이의를 제기한 건 둘째 형과 셋째 누나였지. 그들은 플레인과 기껏해야 1-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고, 실질적인 공로를 따지면 큰형 못지 않게 많은 기여를 한 건 마찬가지였거든...
회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다 못해 결국 둘째 형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어. 뒤를 이어 셋째 누나도 자리를 떠났지. 싸늘하게 가라앉은 회의장에서 어느 누구도 입도 뻥긋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다가, 플레인이 오늘은 이만 하자고 얘기했을 때에야 하나둘 자리를 떴지. 요거트는 거의 마지막으로 회의장을 나섰는데, 슬쩍 뒤를 보았을때 큰형이 굉장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요거트는 잘 알지 못하는 호위 무사와 대화하는 모습이었고...
"진짜 미치겠네. 뭐든 결론이 났으면 좋겠어." 저녁 식사도 밖에서 해결하고 온 요거트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짜증을 냈어. "진작 후계자는 때려 치우겠다고 하고 회의장에서 뛰쳐 나갔어야 했는데. 내일은 꼭 그렇게 말해야지. 누가 뭐라고 하든 다 때려칠거야." 요거트가 다짐하듯 두번 세번 강조해서 말할 때, 라일락은 그저 한숨만 쉬었어. 그 말대로 되었으면 좋으련만... 답답한 마음에 요거트는 저택 본관이 아닌 정원을 가로질러 방으로 가자고 했어.
해가 좀 짧아진 터라 정원에는 금방 어둠이 내렸지. 정원 곳곳에 설치된 등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와 길을 비추었고. 넓은 정원이라 요거트의 방까지 가는 길이 꽤 멀었어. 정원엔 아무도 없어 요거트는 저 하고 싶은대로 마구 걸었지만, 라일락은 혹시 누군가가 정원수 뒤에 숨어 요거트를 노리지는 않을까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요거트의 뒤를 따랐지. 그러다 어딘가에서 말소리가 들렸어. 라일락은 급히 요거트의 입을 가렸고, 요거트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라일락의 망토를 붙잡은 채 소리를 죽였어.
"이런 건 공정하지 못해." 아까 회의장을 먼저 박차고 나갔던 둘째형이었지. 그는 자기 시종 둘과 호위 무사 둘을 대동한 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방은 정원수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어. "모든 상황이 플레인요거트한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회의의 주도권을 잡게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상대방이 무어라 이야기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지. "그녀석이 제시한 의혹을 터뜨리는 건 어때? 확실히 나도 그 부분은 상당히 의심스럽거든. 분명 거기에 플레인요거트가 연루되어 있을 거야. 그자식은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 하지만 뒤에서는 어지간히 수상한 짓을 많이 하거든."
이 말은, 둘째 형 역시 아버지가 독살 당했다는 요거트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런데 그 배후에 큰형이 있다고? 요거트는 바짝 굳은 채 대화에 더욱 귀를 기울였어. "맞아, 증거는 없지. 하지만 밀어붙일 수는 있겠지. 뭐, 어쨌든 내일 회의에서 보자고." 둘째 형은 그렇게 말하고 상대방에게 손짓한 뒤,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어. 정원수에 가린 상대방도 어디론가 가는듯 했고 말이야. 양쪽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요거트는 라일락의 망토를 놓고 한숨을 내쉬었지.
"... 아무래도 내일 회의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 요거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라일락을 바라봤어. 라일락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하지만 경고했지, 요거트크림. 네가 뭘 알게 되었든 간에 아무에게나 비밀을 발설하지 말라고." 요거트는 라일락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13
하지만 다음날 회의엔 놀랍게도 둘째 형은 참여를 하지 않았지. 요거트는 의아했어. 어제 정원에서 그런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고 둘째 형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데에 말이야. 다른 곳에서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요거트는 초조하게 회의장 문을 바라봤고, 어째선지 셋째 누나도 요거트와 비슷한 눈으로 팔짱을 낀 채 회의장을 훑어보고 있었지.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와서는 플레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속닥거리고 나갔어. 플레인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둘째가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하는구나. 갑작스레 아프다고 하는데, 시종을 통해 뜻을 전했다. 여기서 결정된 바에 따르겠다고 말이지." 그 말에 요거트는 깜짝 놀랐어. 어제 정원에서 들었던 말과는 전혀 다르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내 초조한 얼굴이던 셋째 누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 했는데, 플레인이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묻자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어. 그리고는 회의 내내 손톱을 물어 뜯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첫 회의에 독이 든 물을 마시고 참여하지 못했던 형제들은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 회의에도 오지 못했고, 어제부로 자기는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형제간 알력 싸움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도 있었으니, 사실상 회의는 20명의 형제 중에 겨우 다섯 명 정도만 참여한 꼴이었어. 그러다보니 회의 주최자인 플레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가 흘러갈 수밖에 없었지... 셋째 누나가 눈에 띄게 이를 가는 듯 했어. 요거트는 정말 미치도록 답답한 기분에 두 손을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겨우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어. "저기, 나는 이제 후계자 경쟁 같은 건" 요거트가 이제 막 운을 뗀 참인데, 갑자기 회의장 문이 세차게 쾅 열렸어.
"이 자식..., 감히 나를 죽이려 들었겠다!!" 거기서 등장한 건 둘째 형이었어. 그는 어제 정원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눈에 띄게 초췌해진 얼굴로 나타나 플레인에게 삿대질을 했지. "자객을 보내 나를 죽이려고 했지!? 네놈이 저지른 짓인 걸 다 안다. 아버지를 독살한 것도 너잖아!!" 둘째 형은 회의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치더니, 대동하고 온 호위 무사들을 부려 회의장 문을 가로막았어. "이 추악한 자식!! 권력에 눈이 멀어 동생을 죽이려고, 으윽, 하다니!!" 그가 잠시 배를 부여잡고 비틀거리자 곁에 있던 호위 무사가 그를 잡아 지탱해 주었지. 그에 맞춰 셋째 누나도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둘째 형 곁에 가서 섰지. 아무래도 둘이 한 패인듯 했어.
하지만 플레인은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어. "착각도 크구나, 둘째야. 너는 좀 똑똑한 녀석인 줄 알았건만." 그렇게 말한 플레인이 손짓하자, 언제 그렇게 숨어 있었는지 회의장 기둥이며 구석에서 호위 무사들이 나타났어. "뒤로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었던 것은 네놈 아니냐? 네가 반란을 꾸미고 있었던 것 쯤은 이미 파악해 두고 있었다." 반란이라니? 상상도 못한 발언에 요거트는 둘째 형을 쳐다봤어. 설마, 정원에서 했던 말이 그런 의미였던 건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무력으로라도 내 자리를 찾아야겠다!" 그렇게 말한 둘째형이 크게 손짓하자 뒤에 대동하고 있던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회의장 안으로 달려들었지. 동시에 플레인이 데리고 있는 호위 무사들도 맞대응을 하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어! 요거트는 어쩔줄을 모르고 일단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어. 테이블 위로 날카로운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서로를 향해 고함지르는 소리가 날아들고, 의자가 부서지고 창문이 박살났지. 요거트는 눈을 질끈 감았어. 이런 사태는 상상도 못했는데!
혼란한 틈을 타 회의장을 빠져나가야 했지만, 둘째 형은 진짜로 크게 반란을 일으킬 셈이었는지 회의장 밖으로부터 수많은 호위 무사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어왔어. 플레인이 확실히 불리한 상황이었지. 그런데 궁지에 몰리면서도 플레인은 침착한 듯 보였고, 거기에 부아가 치민 둘째 형이 직접 칼을 빼들고 그에게 달려들었어. 그 순간 회의장 양쪽의 창문이 와장창 깨지면서 바깥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어. 저택에서 일하는 호위 무사가 아닌, 고용된 용병들이었어!
"무슨...!" 당황한 둘째 형이 주춤하자 플레인이 그제야 입꼬리를 비틀어 씩 웃었지. "나도 반란에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지. 플레인이 고용한 용병들은 매우 노련한 자들이어서, 회의장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도 아주 날렵하게 움직이며 호위 무사들을 하나씩 쓰러뜨려갔어. 여전히 테이블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요거트는 제 앞에 호위 무사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지. 이대로는 저기에 휘말려서 목숨도 보전하지 못하겠다 싶은 순간에, 테이블 아래로 누군가가 머리를 불쑥 들이밀었어. "요거트크림!"
"라, 라일락!!" 그게 누구인지 알아본 요거트는 화색이 되었지. 라일락은 혼란한 틈을 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요거트를 찾은 거였어. 물론 그 와중에 저에게 달려드는 용병 몇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라일락은 요거트에게 팔을 뻗었지. "여기서 도망치자!" 요거트는 그 팔을 덥석 붙잡았고, 라일락은 힘으로 요거트를 테이블 아래에서 끌어낸 뒤, 단단히 허리를 감싸 안았어. 그 순간 누군가가 던진 날카로운 단검이 요거트를 향해 날아들었고, 라일락은 차크람으로 그걸 튕겨냈지. 그걸 보고 다시 몇몇 용병들이 그에게 달려들었어. 라일락은 일단 요거트를 안은 채 허리를 숙여 공격을 피하고, 요거트는 그대로 허리를 눌러서 바닥에 엎드리게 만든 뒤에 차크람을 던지지 않고 손에 쥔 채 저에게 달려드는 용병 둘을 베어냈어. 날카로운 날에 베인 용병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요거트는 후두둑 떨어지는 피를 몇 방울 맞으며 진저리를 쳤어.
치열한 싸움은 길게 이어졌어. 양측 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지. 회의장은 이제 부서진 가구보다 쓰러진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었는데, 그래도 아직 싸우고 있는 자들이 더 많았어.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도망치는 건 쉬운 일인데, 사방이 난전이라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어. 라일락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아무나 공격하는 용병들을 막아내고 쓰러뜨려가며 요거트를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했어. 라일락이 보통 실력자가 아님을 안 용병들은 이제 섣불리 그를 공격하지 않았지.
"크흑, 이..., 자식...!" 회의장 한쪽에서 큰 신음소리가 들렸어. 둘째 형이 손에 든 칼을 놓치고, 한쪽 팔을 부여잡은 채 크게 부들부들 떨었지. 그는 플레인 앞에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어. 플레인은 "상대를 가려가며 덤벼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했고, 그 뒤에는... 익숙한 붉은 머리와 긴 소매의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지. 요거트도 라일락도 단숨에 그게 누구인지 알아봤어. 나가의 심장을 구하러 갔던 그 여행의 길잡이, 전갈이잖아! 너무 놀란 요거트는 숨을 멈춘 채 플레인과 그 뒤에 선 전갈을 쳐다보았어. 라일락도 마찬가지였고. 전갈이 그들의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조용히 입을 가린채 웃었지.
플레인은 허리를 숙이고,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동생의 턱을 틀어쥐듯 잡아 억지로 시선을 맞추었어. "내가 아버지를 독살했다 했지? 그렇다면 어쩔테냐?" 둘째 형이 눈을 크게 떴고, 요거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어. "역... 시, 네놈이, 저지른... 짓이었... 크흑...." 둘째 형은 크게 기침을 했고 피가 터져나와 턱이며 앞섶을 물들였지. "그건 맹독이다. 네 혈관을 타고 폐를 파괴할." 잦은 기침 사이로 플레인이 동생을 잠식해 드는 독의 정체를 읊었어.
폐를 망가뜨리는 독. 요거트는 그대로 얼어붙었지. 그때 그 남자를 죽였던 독이야. 독의 종류는 수백, 수천 가지나 될텐데 하필이면 같은 종류의 독을 사용한다고? 요거트는 자기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지. 라일락 역시 법정에서 부검 결과를 들었기 때문에, 저 독이 그때 독과 비슷한 것임을 알았고, 요거트가 패닉 상태가 되는 걸 눈치챘어. "정신 차려, 요거트크림." 라일락이 속삭였지만 요거트는 들리지 않는 듯 했어.
"어떻게..., 이런, 짓을... 천, 벌을..." 둘째 형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크게 기침하며 다시 피를 쏟아냈어. 턱을 쥔 플레인의 손이며 옷에 피가 마구 튀어댔지. "옷이 더러워졌구나." 플레인은 그대로 동생을 내팽개쳐 버렸어. 둘째 형은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에 쓰러졌지. 쓰러진 동생이 괴로워하는데도 지그시 밟은 플레인은 사방을 둘러 보았어. 제가 모시던 주인이 쓰러지자 당황한 호위 무사들은 기세가 금방 꺾여버렸어. 그 찰나에 남은 용병들이 호위 무사들을 가차 없이 베었지.
"여기 있었구나." 가슴에 난 상처를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셋째 누나를 발견한 플레인이 그녀에게 다가갔어. 그녀는 방금 전에 제 오빠가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금빛 독침에 목을 찔렸어. 짧은 비명과 함께 그녀도 금세 숨을 거두고 말았지.
이제 이 회의장 안에 살아남은 동생은 없어. 플레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를 닦았지. 헌데 아직 싸우고 있는 자가 있잖아? 플레인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지. 그 찰나에 라일락이 마지막 남은 용병을 베어 떨쳐내었고, 그는 플레인과 눈이 마주쳤어.
"네놈은 요거트크림의 호위 무사로구나." 플레인이 라일락을 알아보았지. 그리고 라일락 뒤에 숨은 제 동생도 발견했어. "거기에 숨어 있었느냐? 요거트크림." 라일락은 플레인의 시선을 눈치채고 요거트를 뒤로 숨기듯이 그 앞을 가로막았지. 플레인의 뒤에서 전갈이 걸어나왔어... "오랜만에 다시 보네, 라일락." 그녀는 긴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지.
"앞으로 나오너라. 지금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았겠지. 내 앞에 엎드린다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플레인이 라일락 너머의 요거트에게 말했어. 요거트는 두 손을 질끈 맞잡고 덜덜 떨었지. 방금 전까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동생 둘을 직접 죽여버린 형이야.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요거트는 앞으로 나서는 대신,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의혹을 입밖으로 냈지. "형이..., 혹시 그때 그 남자도, 형이 그렇게 만든 거야?" 다소 엉뚱한 질문이어서 플레인이 의도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 후에, 그가 큰 소리로 웃었어.
"그때 그 남자 말하는 것이더냐? 우리 집에서 열린 사교계 모임에서 죽은 그 남자... 너를 귀찮게 하는 녀석이었지. 내가 대신 처리해 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 형이 저지른 짓이 맞았구나! 요거트는 이를 악 물고 눈을 감아버렸어. 그런데 플레인의 말이 끝나지 않았어. "하지만... 그놈은 사실 운이 없었던 게야. 그 술을 마셨어야 했던 건 너였지. 착오가 있었는지 술잔이 바뀐 덕에 너는 살고, 귀찮은 놈은 죽지 않았느냐. 어서 나와 형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지!"
상상도 못한 광기 어린 진실에 요거트는 그대로 숨이 멎는듯 했어.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하는 건 '너'였다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대었고, 목이 메어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어. 그래도 요거트는 있는 힘을 짜내어 미쳐버린 제 형에게 물었지. "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라는 말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어. 플레인이 큰 소리로 웃어제꼈거든.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보다시피! 우리 집안에서 가장 가치 없는 놈은 너야, 요거트크림. 그런 주제에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지를 않나, 내 앞길을 가로막지를 않나, 아주 재수없게 굴었지!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돈이나 쓸 줄 아는 놈팽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가 너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이야기를 나한테 먼저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요거트는 형의 분노와 원망을 그대로 받아내며 제 머리를 틀어 쥐었어... 이제는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어느새 흐르기 시작한 눈물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지. 가치 없는 동생, 놈팽이 같은 자식, 앞길을 막는 방해꾼. 죄다 요거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들이었지. 요거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래, 이리 나와 나에게 목숨을 빌 의지조차 없는 게로구나. 그렇다면..." 플레인이 전갈에게 손짓했어. 전갈은 빠르게 라일락을 향해 달려들었고, 라일락은 즉시 전갈과 대치했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전갈은 진심으로 기쁜 얼굴이 되어 활짝 웃었지. "그때 마무리 짓지 못한 결투, 여기서 끝내도록 하자." "착각하지마. 그때 결투는 네 패배였으니까." 라일락은 날이 상한 차크람은 내던지고, 주변에서 쓰러진 용병에게서 단검을 주워 들었지. "어머? 단검은 나랑 싸우기에 적절한 무기가... 아닐텐데!" 전갈은 라일락을 향해 독침을 던졌지. 라일락은 재빠르게 뒤로 빠지며 독침을 피했어.
황금 신전에서 한번 맞붙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의 전투 방식을 알고 있어 싸움이 더욱 치열해졌어. 전갈은 그때보다 더 많은 독침을 품에 숨겨왔고, 라일락을 노리면서도 동시에 뒤에 있는 요거트를 노리고 독침을 던져댔지. 라일락은 저를 향해 날아오는 독침은 몸을 움직여 피하고, 요거트를 향해 날아드는 독침은 주변에 있는 잡기를 던져 튕겨내며 방어했어.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전갈이 활짝 웃으며 빠르게 라일락에게 달려들어 그의 턱을 향해 독침을 들이댔고, 라일락은 허리를 꺾으며 공격을 피했지. 독침에 스친 보랏빛 머리칼 몇 가닥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라일락이 먼저 다리를 휘둘러 그녀의 허리를 강타했어. 전갈은 허리를 맞아 뒤로 밀려나가면서도, 입 안에 숨겼던 독 구슬을 내뱉어 터뜨리며 독연기를 만들어 냈지. 라일락은 얼른 그 자리를 피했어. 빠르게 피하긴 했지만 독을 약간 들이마신 모양인지 순간 시야가 흔들렸지.
전갈은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품에서 독침을 꺼내 들었고, 라일락에게 던지는 척 하다 그대로 팔을 틀어 요거트를 노렸어. 라일락은 손에 든 단검을 던져 독침을 공중에서 떨어뜨렸지만, 그 찰나에 빠르게 다가온 전갈을 밀어내는 건 약간 늦었어. 그녀의 독침이 팔을 약간 스쳐버렸지. 하지만 라일락은 손을 뻗어 전갈의 멱살을 틀어 쥐었고, 그대로 그녀를 바닥에 내리 꽂아버렸어.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히며 등에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짧은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었지.
전갈을 처리했지만 들이마신 독과 팔에 스친 독침으로 인해 급격하게 시야가 흐려져 갔어. 라일락은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 앉았지. 생각보다 독이 빨리 퍼지는 모양이었어. 하긴, 전투용이니 효과가 가장 빠른 것으로 골라왔겠지. 라일락은 그 와중에도 요거트를 돌아봤어. 요거트는 아직도 충격을 받은 채 저 자신을 감싸고 덜덜 떨고 있다가, 라일락이 무너지는 걸 보고 정신이 든 모양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라일락!!" 요거트가 그를 부르며 달려왔는데.
"안돼, 요거트크림...!!!" 그 찰나에 플레인이 품에서 단검을 뽑아들고 요거트에게 달려드는 것을 발견한 라일락은 대체 무슨 힘이 그를 이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으로 다리를 움직여 요거트 앞을 가로 막았어. 그리고 날카로운 통증이 복부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지.
"라, 라일락!!!" 요거트가 비명을 질렀어. 플레인은 잇새로 칫 소리를 내더니 라일락의 배를 찌른 단검을 뽑아버리고, 그를 치워버리며 요거트를 찌르려고 했지만, 라일락이 먼저 플레인의 팔목을 잡았어. 그리고 강하게 비틀었지! 플레인은 라일락이 이정도까지 버틸 줄 몰라 방심하고 있다가, 손목이 꺾이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떨어뜨렸어. 라일락은 떨어지는 단검을 낚아챘고, 그대로 그걸 들어 플레인의 목덜미를 깊게 찔러버렸어.
"으, 크, 하악...!" 단검에 목을 찔린 플레인이 고통에 겨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어. 그는 제 목을 틀어잡고 흐르는 피를 막아보려 애썼지만 급소를 공격당해 피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양이 흘러나오고 있었지... 그는 비틀거리다 주저앉았고, 곧이어 앞으로 거꾸러지며 숨을 거두고 말았어.
"안돼, 라일락...! 라일락!!" 플레인이 쓰러짐과 동시에 라일락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 독으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단검에 찔린 복부는 쓰라리듯 아팠지. 요거트가 얼른 그를 감싸안았어. 라일락은 저를 감싸 안는 손길을 느끼며 요거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지. "의, 의사를 불러올게!! 라일락, 죽으면 안돼...!!" 이미 패닉 상태인 요거트가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라일락이 요거트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가로저었어. 어차피 요거트가 의사를 불러오기 전에 숨이 다하고 말거야. 그러느니 차라리 네가 옆에 있어주는 게 나아. 라일락은 짧게 기침했지.
"왜, 왜, 의사가 너를 치료할 수 있을거야. 금방 불러올 수 있다고! 라일락...!!" 요거트가 라일락을 붙잡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어. 하지만 힘이 부족해 그를 들어올리는 건 역부족이었지. 나를 들어올리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의사를 불러와. 라일락은 쓴웃음을 지었어. 정신이 점점 흐려지고...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지.
"아니야..., 아니야, 너는 죽으면 안돼, 언제까지고 나를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호위 무사가 이렇게 죽으면 어떡해!! 절대 안돼, 못해, 제발...!" 이제 요거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어떻게든 라일락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어. 하지만 라일락의 몸이 자꾸 늘어지면서, 그의 숨이 점차 느려지는게 느껴져... 요거트는 필사적으로 외쳤지ㅡ "죽지마, 라일락...!!!"
그 순간 무언가 요거트의 품에서 툭 떨어졌어. 기이한 푸른 비취색이 나는 보물, 나가의 심장이었지. 그걸 얻은 뒤로 요거트는 어쩐지 그것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품에 계속 가지고 다녔던 거거든. 그 보물을 발견한 순간, 요거트는 플레인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지. "그건 신의 정수이고, 모든 병을 치료하는 영약이다" 라는 말을. 요거트는 당장 그것을 집어들었어. 마치 처음 그 보물을 얻었을 때처럼 손바닥에 뜨끈한 기운이 퍼졌고, 찰칵 소리와 함께 보물의 아랫부분이 열리면서 내부에 들어있던 이상한 푸른 비취색의 액체가 흘러나왔지.
그게 진짜 신의 정수이자 영약일지, 혹은 어떤 효과도 없는 것일지, 그것도 아니면 사람을 단숨에 죽여버리는 맹독일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 요거트는 즉시 그것을 들어 보물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를 제 입에 머금었지. 그리고 그대로 라일락에게 입을 맞추었어.
입 안에서 단맛도 쓴맛도 아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맛이 났어. 이 세상에서 단 한번도 맛보지 못한 그런 맛. 그리고 머리가 어지러웠어.
이건... 신의 정수가 아니라 신의 저주가 담긴 맹독인 걸까?
요거트는 라일락이 제가 입으로 넘겨준 기이한 액체를 삼키는 걸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지...
사방이 고요했고, 어두웠어. 어쩌면 포근한 것 같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손을 잡았어. 다소 거친데, 따스한 손길. 아, 이게 누구 손인지 알아. 이건 라일락의 손이야. 그럼 그가 곁에 있는 걸까? 요거트는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칠흑같은 어둠만이 있을뿐.
역시 신의 정수이니,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영약이니 하는 것은 다 전설일 뿐이었나봐. 요거트는 허탈함에 헛웃음을 지었지.
"왜 웃는 거야. 일어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어. 마치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요거트는 다시 고개를 돌렸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손을 잡은 손길에 힘이 들어가 굳게 잡아주었지.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면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온통 몰아닥쳤어. 요거트는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지. 그러면서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어.
"아야." 요거트 곁에 있던 누군가가 짧게 소리를 냈지. 요거트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어.
"일어나랬다고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다니." 라일락이, 턱을 문지르며 요거트를 흘겨보고 있었어...! 요거트는 그를 알아보고, 그가 살아있음을 알고, 자기를 흘겨보던 눈이 어느새 안도의 미소를 가득 담은 빛을 띄는 걸 마주하며...
"라일락!!"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지.
모든 것이 끝났어.
엉망진창이 된 회의장에서 살아남은 건 라일락과 요거트뿐이었지. 음모를 주도했던 플레인은 물론이고, 반란을 꾸몄던 둘째 형과 셋째 누나와, 그들이 고용한 용병과 호위 무사들, 그리고 애꿎게 회의에 참석했던 몇몇 형제들마저 모두 죽었어. 저택에 남은 다른 호위 무사들과 시종들이 기겁하며 사태가 벌어진 곳을 정리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그 중에 붉은 머리를 가진 암살자의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어. 라일락은 그녀가 잠시 정신을 잃었을뿐,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도망쳤을 거라고 예상했지.
사태를 정리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 화를 면한 건 그날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다른 형제들뿐이었지. 그들은 요거트로부터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치를 떨었어. 그리고 요거트가 사태를 수습하는 걸 도와주었지. 요거트는 남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거기서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식을 열었지. 하지만 정작 본인은 참여하지 않았어. 덕분에 요구르카에는 이들을 죽인 것이 혹시 요거트크림이 아니냐 하는 헛소문이 잠시 돌았는데, 요거트 가문에서 먼저 이 사태에 대한 공식 성명을 내면서 소문을 일축해 버렸고, 이 이상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은 법적으로 처벌받는다고 공표했어. 그러니 요구르카의 어느 누구도 더는 요거트를 의심하지 못했지.
장례가 끝난 뒤에 다시 후계자 논의가 이어졌어. 요거트는 원치 않았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요거트가 상단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했어. 요거트는 자기는 진짜로, 정말로, 맹세코 이 상단 전체의 주인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우겼어. 지금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너무 다행이고 힘들다고 말이야. 그래서 또 가족 회의가 열렸지... 거기서 요거트는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자기는 그저 자기가 원래 운영하던 상단만 가지고 있겠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어. 결국 아버지가 정했던 원래 후계자 후보 중에 그나마 나이가 많은 형님이 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지.
모든 정리가 끝난 뒤에, 새로운 상단 주인을 위한 화려한 연회가 열렸어. 굉장히 좋은, 아름다운 날씨였지. 요구르카의 모두가 축제를 만끽하며 새로운 상단 주인을 축하하고, 그의 앞길이 순탄하길 빌었지. 요거트도 마찬가지였고 말이야.
한참 정원에서 연회가 벌어질 즈음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요거트는 잠시 쉬고 싶어 저택 본관 2층 발코니로 올라갔어. 그리고 난간에 걸터앉아 정원을 내려다 보았지. 여기서 바라보니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적절히 멀게 느껴져서 딱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위험하니까 거기는 앉지 말라고 했잖아." 연회에 맞추어 연회복을 갖춰입은 라일락이 다가와서 요거트의 팔을 잡았지. 내려오라는 뜻이었어. 요거트는 "또~ 잔소리하네. 정말." 가볍게 투덜거리며 라일락이 이끄는대로 난간에서 내려왔어. 라일락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왜 연회에 참여하다 말고 혼자 여기에 왔는지 물었지. 요거트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하고,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라고 답했어.
"그럼 나도 자리를 비켜주어야겠군." 라일락이 작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려 했어. "아, 잠깐만!" 요거트가 그를 불렀지. 라일락은 발코니를 나서려다 말고 멈춰서서 요거트를 돌아보았어. 요거트는 난간을 두 손으로 짚고 허리를 기댄채, 라일락을 바라보고 있었지.
"라일락, 정말 고마워... 그리고 고생 많았어." 요거트가 천천히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어. 그 순간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요거트가 쓴 터번에 달린 반투명한 베일이 흩날렸지. "너한테 정말 신세 많이 졌어... 그러니 이번엔 네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 원하는 건 뭐든 말해도 좋아. 네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게!" 요거트가 라일락을 마주보며 활짝 미소지었어...
다시 바람이 불었어. 요거트가 바람에 흐트러지는 앞머리를 쓸어넘겼지. 저 표정, 손길, 눈빛 하나하나 마저도 사랑스러운 나의 도련님. 라일락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요거트를 바라만 보았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거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꺼내지 못할 말일 거야. 라일락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어.
"... 나는" 라일락이 운을 떼자 요거트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다 그를 돌아보았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는 눈빛이었어.
"내가 원하는 것은..." 푸른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자 라일락은 가슴 깊은 곳이 작게 고동치다 점차 크게 두근대는 걸 느꼈지. 요거트가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어.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듯이.
라일락은 주먹을 꾹 쥐었어. 목끝까지 차오른 말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라일락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밀어냈어.
"... 오로지 너 하나뿐이야, 요거트크림."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었던 말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어. 그 순간에 흐르던 정적을, 라일락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너무나 놀란 눈으로 얼이 빠져선 자기를 바라보는 요거트의 얼굴도... 요거트는 그런 말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눈으로 라일락을 바라봤는데, 라일락은 역시 괜히 말했나 하고 "아니, 이건 그" 손을 내저으려다가,
제 품에 달려드는 요거트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지. "그런..., 그런게 어디있어, 라일락!!" 요거트가 큰 소리로 외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어. 라일락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싶으면서도 두 팔로 요거트를 꽉 끌어안았지. "너무 간단한 소원이잖아! 난 또 무슨 엄청난 걸 바라는 줄 알았네!" 요거트는 푸하하 웃으면서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 거기에 금세 물기가 스며드는 걸 라일락은 알 수 있었어...
"정말 나 하나면 충분해, 라일락?" 라일락의 품에 얼굴를 묻어버린 채 요거트가 물었어. 라일락은 손을 뻗어 요거트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지. 그리고 짧고 힘있게 대답했어. "응."
다시 바람이 불었어. 요거트의 베일이 바람에 흩날렸고, 그 틈을 타 요거트는 라일락에게 입을 맞추었지. 수줍고 따뜻하고 달콤한 입맞춤. 요거트가 살짝 눈물진 눈으로 웃으며 라일락에게서 떨어졌어. 라일락은 다시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지.
아득히 먼 곳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 마치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처럼 말이야.
◆ 설정 및 주저리
1. 라일락이 암살자, 무도가가 아님
시작할 때 보면 라일락이 10살에 노예시장에 팔려나갔다가 요거트 도련님의 생일 선물로 이 집안에 들어온 걸로 설정되어 있습니다ㅋㅋㅋ 그냥 도련님의 가장 가까운 시종으로 들어온 아이여서, 암살은 물론이고 무도도 배우지 않았습니다ㅋㅋ 대신 11살부터 무술 훈련을 받았는데, 주 무기는 차크람이라고 써놨지만 사실 어떤 무기를 쥐어주어도 다 잘 다룬다는 설정이 있습니다ㅋㅋㅋ 무술 사범님이 개빡세게 가르쳤는데, 재능이 있어 잘 따라갔거든요. 마지막에 26살로 끝나는데요. 15년간 갈고 닦은 무술 고수입니다ㅋㅋㅋ
2. 요거트네 형제가 20남매
플레인이 맏형이고 그 아래로 18명의 형 누나들을 거쳐 마지막 20번째가 요거트크림이에요ㅋㅋㅋ 아버지는 한 분이지만, 어머니는 한 분이 아닙니다ㅋㅋㅋ 예로 첫째인 플레인과 둘째 형부터 어머니가 다름ㅋㅋㅋ 둘째 형과 셋째 누나는 한 어머니한테서 난 남매고요. 여담으로 요거트의 어머니가 가장 어립니다. 작중 내 묘사되는 집안 어른들이란, 아버지를 비롯한 어머니들과 아버지의 형제들(요거트에게는 큰아버지와 고모들)이지요.
3. 요거트의 약혼녀
요거트처럼 머리가 길고, 하얀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서글서글한 인상이 참한 아가씨라고 설정하고 썼는데 외모에 대해 묘사할 일이 없었던... 기본적으로 순하고 착한 아가씨지만, 요거트 도련님이 헛소리를 하면 등짝을 때릴 수 있는 당찬 아가씨였습니다ㅋㅋ
4. 그 남자
검은 머리, 검은 눈이고, 키가 크고 말랐습니다. 하급 귀족 집안이라 그리 풍족하지 않은 시절을 보냈기에 자라서 자기가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지요.
5. 가족 회의
요거트네 가족이 많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가족 회의가 열리고, 긴급 사안이 있을땐 비정기회로 열린다는 설정ㅋㅋㅋ 20세부터 참여할 수 있고, 참여는 자유이지만 불참시 결정된 사안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ㅋㅋ
6. 요거트와 상단 운영
원작에서는 요거트가 끊임없이 난 상단 운영에는 관심 없어~ 라고 어필하고 있지만... 그러면 아무런 일도 발생시킬 수가 없어서ㅋㅋㅠㅠㅠ 그리고 아무리 도련님이 상단 운영에 관심이 없다고는 해도 성공에 대한 욕구가 아예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ㅋㅋㅋ 그래서 20세에 아버지에게 받은 아주 작은 상단을 운영하면서 감각을 익히고 조금씩 성장시켜 나가는... 약간 용돈벌이 같은 느낌 정도는 충분히 할만 하지 않을까 싶어서 넣은 설정ㅋㅋㅋ 상단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일을 했으니 그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뭐 딱히 실패해도 상관 없다 왜냐면 어차피 나는 이게 망해도 잘 살 수 있을만큼 부자니까~ 하는 약간 시혜적인 마인드가 큽니다ㅋㅋㅋ 그러다 귀한 걸 얻어오면 누구보다 기뻐하는 미니 상단주 요거트 도련님ㅎㅎ
7. 나가의 심장
동갑내기 라일요거에게 닥치는 위기 중 하나로 꼭 쓰고 싶은 소재였는데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까 머리를 엄청나게 굴린 결과ㅋㅋㅋ 그냥 보석이 아니라 신의 정수이자 만병을 다스리는 영약이 되었습니다ㅋㅋㅋ 원래 설정에는 마지막에 다 죽어가는 플레인이 요거트의 다리를 붙잡고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나는 네 형이고 가족이다, 그것으로 나를 살려다오... 하고 매달리고, 요거트는 형의 애처로운 애원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 모든 일이 사실은 형이 꾸민 끔찍한 계획이었다는 걸 상기합니다... 그리고 형을 버리고 라일락을 선택하는 장면을 넣으려고 했지만! 그렇기에는 이전에 플레인과의 유대가 너무 덜 보여지지 않았나ㅋㅋㅋ 요거트가 그 장면에서 고민할 명분이 없었던 거죠ㅋㅋㅋㅋ 그래서 그냥 날려버렸습니다ㅋㅋ 깔끔하게 삭제... 라일락에게 한방컷 당해버린 플요형...
그거 외에도 나가의 심장을 플요가 뺏어갔다가 마지막에 그의 품에서 다시 발견해서 그걸로 라일락을 살리는 장면도 고민했지만, 글케 고생했는데 홀라당 뺏기는 것도 좀 억울하지 않나 싶어 그냥 냅뒀네요ㅋㅋ 지금 쓰고보니 이것도 괜찮은 거 같은ㅋㅋㅋ ㅋㅋㅋ ㅋㅋㅋㅋ 참고로 전갈이 언급했던 "누군가는 그걸 얻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의 주체 역시 플레인입니다ㅋ ㅋㅋㅋ ㅋㅋㅋ ㅋㅋㅋㅋ 그걸 얻어서 아버지께 잘 보이려고 했으나 보물은 플레인을 자기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ㅋ ㅋㅋㅋ ㅋㅋㅋ ㅋㅋㅋ
8. 전갈
라일락의 서사에서 암살자였던 과거가 완전히 삭제되어서, 라일락과 전갈은 그냥 무인으로서 대결하는 관계가 되었네요ㅋㅋㅋ 고수와 고수의 대결ㅋㅋㅋ 사실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예요... 소꿉친구니 뭐니 이런 연 하나 없이 오로지 무술로만 대결하는 두 사람... 전 진짜 좋았는데ㅠ 마지막에 전갈은 안 죽인 이유는 그냥... 원작을 생각하면 진짜 미묘한 기분이 들어요 전갈이ㅋㅋㅠㅠ 원작에서도 결국 요거트를 죽이는 걸 포기하고 니들끼리 잘 살어~ 하고 도망쳐 버렸잖아요 사실ㅋㅋ 라일락과의 과거를 생각하면 더 집착할만 한데 너무 깔끔하게 떨어져서... 그걸 생각하니까 뭔가 죽이기엔 좀... 아깝다 뭐 이런 느낌이라서, 기절했다가 도망쳤다고 해버렸네요ㅋㅋㅠㅠ 뭐 전갈이라면 다시 요구르카 뒷골목에 숨어서 잘 지내리라고 생각합니다...
길었습니다!
긴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같이 달려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끝까지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후일담은 천천히 업로드 됩니다.
추가되면 덧붙이도록 할게요><
2021.1027 설정 및 주저리가 추가되었습니다.
2021.1121 너무 긴 내용을 좀 더 잘게 쪼갰습니다.
2022.1116 카테고리 및 제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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